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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비뇨계 결석 제거술의 역사


프랑스 음악가 마랭 마레(Marin Marais;1656~1728)는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 1991)>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아주 조금 알려진 17~18세기 음악가다. 그는 비올(Viola da gamba) 연주자이자 작곡가였고, 베르사이유에서 루이 14세의 궁정음악가로 활약했다. 그는 아주 특이한 작품 하나를 남겼는데 의사라면 누구라도 들어봐야 할 작품이다.  

<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라는 작품 제목을 우리말로 풀면 <절제 수술대>가 된다. 이것은 자신이 1725년에 겪었던 방광 결석 제거수술을 표현한 음악이다. 인터넷에서 다양한 영상과 연주를 찾아볼 수 있지만 필자가 추천하는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kVH0qoJZDho) 6분짜리로 310초까지는 끔찍한 수술, 이후로는 회복기의 소회를 표현하고 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영상을 감상해야 할 것이다.  


비뇨계 결석(urolithiasis)는 과거에는 아주 흔했던 병이다. 남자와 어린이에게 많았다. 추위, 비뇨기 감염, 부족한 식수 등이 원인이었다.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고, 환자가 된다고 해도 마레가 당한 끔찍한 수술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 병이다. 하지만 의학 역사 특히 외과 수술의 역사에서는 결석 수술은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오늘은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비뇨계 결석 수술의 오싹한(!) 과거사를 한번 알아보자.     

 

오래된 병, 오래된 수술

7천년 전에 살았던 이집트인 유골에서도 결석이 발견될 정도로 이 병은 오래된병이다. 신장, 요로, 방광에 결석이 생기면 몹시 아프다. 더하여 이 걸리면 산통(colic)이라 부를 정도로 몹시 아프다. 이것도 힘든데 수시로 소변을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화장실에 가면 소변은 안 나오면서 돌이 걸려 또 아프다. 방광이 안 비워지니 다시 소변을 보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지고, …. 악순환을 돌며 환자는 생지옥 속에 산다.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지쳐 점점 시들어 가 환자는 결국 죽는다. 마지막 순간에는 차라리 죽게 되어 너무 행복하다며 죽어갔다.

           의사들은 뼛가루나 산토끼 발바닥을 먹이고, 물을 많이 먹이고, 온욕, 운동 등을 처방했다. 물을 많이 마시면 결석의 자연 배출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안전하고 깨끗한 식수 보급은 근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수술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그런데 방광 안에 들어있는 돌을 어찌 빼낼 것인가?

 

고대 이집트에서는 요도를 확장시킨 다음 손가락이나 입으로 돌을 빼내기도 했다. 고대 인도에서는 명의 수슈르타(Sushruta)가 개발한 시술법을 이용해 돌 빼는기술자가 따로 있었다. 서양에서 오랫동안 쓰인 이 시술법을 살펴보자.

시술자는 환자의 직장(rectum)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다음 직장 앞의 방광을 더듬어 방광에 있는 돌을 찾는다. 돌을 찾으면 손가락으로 걸어 샅(회음부; perineum)쪽으로 찍어 누른다. 이때 샅에서 보면 돌이 피부 아래도 돌출되며 두드러져 보인다. 그 자리를 재빨리 칼로 절개한 후, 집게나 갈고리로 돌을 걸어 끄집어낸다. 샅의 절개부는 꿰매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데도 잘 아물었다고 한다.

           1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켈수스(Aulus Cornelius Celsus; 25 BC~50 AD)는 저서 <의학에 관하여(De Re Medica Libri Octo)>에서 로마의 결석 수술 장면을 묘사했는데, 인도의 수술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망하고 나서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 서적들은 동방의 사라센으로 넘어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사라센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확장되었다. 10세기에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사라센 제국에 속했고 남쪽의 코르도바에는 알 자라위 혹은 알부카시스로 알려진 아라비아인 의사(Al-Zahrawi, Albucasis, Ibn Abbas Alzahrawi; 930~1013)가 활동했다. 그의 손으로 오래된 결석 수술은 조금 개량되었다.

알 자라위는 직장으로 손가락을 넣어 돌을 찾는 방법을 포기했다. 대신 샅을 절개해 바로 방광 경부까지 들어간 다음 방광에서 직접 돌을 끄집어냈다(perineal cystolithotomy). 알 자라위의 의학 서적는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수술도구들과 함께 중세 유럽으로 건너왔다.

 

짐작하겠지만 결석의 고통만큼이나 수술의 고통도 컸다. 하지만 그 끔찍한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날카로운 수술 칼날에 목숨이 그냥 날아갈 수도 있었고, 살아남았다고 해도 평생 실금(incontinence), 발기부전(impotence), 누공(fistula)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한마디로 위험천만한 수술이었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에 활약했던 히포크라테스<선서(the Oath)>에 굳이 이런 말을 남겼다.

 

결석은 직접 제거하려 하지 말고 돌 빼는 기술자에게 맡길지어다….

 

다도구 수술의 등장

로마와 코르도바를 거쳐오며 약간 개량된 수술법은 ()도구 수술(Le petit appareil)’로 불렀다. 시술자의 준비물은 칼과 집게면 족했으니 도구가 간소하다는 뜻이었다. 반대로()도구 수술(Le grand appareil)’에는 수술 도구가 많이 필요했다. 16세기가 되면 소도구 수술은 다도구 수술로 대체되었다.    

다도구 수술은 1520년경에 크레모나 출신의 의사인 로마니스(Franciscus de Romanis of Cremona)가 처음 시작했는데, 그의 제자인 마리아누스 상크투스(Marianus Sanctus)가 널리 퍼뜨린 탓에 마리안 수술(Marian operation)로 알려졌다.  

마리안 수술에서는 환자의 요도에 홈이 있는 막대를 집어넣은 다음, 막대를 따라 샅을 절개해 깊이 들어가 방광으로 들어갔다. 막대가 탐침(probe)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다도구 수술의 장점은 회음근육(perineal muscles)을 절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도구 수술에 비해 출혈도 통증도 더 심했다. 더하며, 요실금, 누관, 발기부전은 더 많이 생겼다. 솔직히 왜 했는지 잘 모르겠다.  

마리안 수술법은 좀 더 나은 볼리외의 측면 절개법(lateral lithotomy)으로 개량된다. 요도로 가이드를 넣은 다음, 샅의 정중앙이 아닌 측면으로 골반근육을 절개하며 방광으로 들어갔다. 해부학적으로도 이 방법이 바람직했다. 하지만 당대의 의료계 주류와 의대 교수들은 이 수술법을 반대했고, 루이 14세가 수술 현장을 참관하고 볼리외의 실력을 인정하는 바람에 공인된 수술법이 되었다.  

 

볼리외(Frère Jacques Beaulieu 혹은 Frère Jacques Baulot;1651–1720(1714?)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인 유랑 치료사의 도제가 되어 결석 수술에 입문했다. 오랜 기간 떠돌다가 46세에 파리에 입성하여 오텔 디외 병원(Hôtel-Dieu de Paris)을 거쳐 베르사이유에 정착했다. 하지만 수술 후 사망 환자들이 속출하자 그만두고 방랑길에 올랐다.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결석 치료사가 되어 기량을 다시 쌓아갔다.

1701년에 다시 파리에 복귀해서 38건의 결석 제거수술을 했는데 이번에는 수술로 죽은 사람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이것으로 그의 기량은 충분히 인정받았다. 하지만 수술받은 장군이 숨지는 일이 생기자 그는 다시 일을 그만두고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유럽 전역을 떠돌며 수술을 했고, 그의 손으로 수술한 이는 5,000명은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요한 형제/수도사(Brother John)’로 불렀다. 반쯤은 속세를 떠난 사람이었던지 수술비도 아주 적게 받았고 유산도 모두 기부했다. ‘결석계의 성자로 불릴만하다.  


프랑스에 볼리외가 있었다면, 영국에는 체즐던(William Cheselden; 1688~1752)이 있었다. 런던의 웨스터민스터병원(the Westminster Infirmary)의 외과의사로 과학자 뉴턴과 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그의 환자였다. 체즐던은 수술을 빨리 끝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마취가 없던 시절에는 엄청난 경쟁력이었다. 

 

체즐던은 1722년부터 샅이 아닌 하복부의 치골 상부를 절개해 방광으로 들어가 돌을 빼냈다. 이듬 해에 수술 성과를 자랑스럽게 발표했는데 뜻밖에도 표절 시비에 휘말려버렸다. 같은 병원에서도 일했던 더글러스(John Douglas; ?~1743)가 이미 5년 전에 그 시술을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몇 년 동안 다투며 앙숙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체즐던은 새로운 수술법을 포기하고 다시 샅을 절개하는 볼리외법으로 돌아갔다.

더글러스가 선취권을 주장한 수술법은 사실 150년 전인 1561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다. 프랑스 위그노교도로 로잔에서 일했던 프랑코(Pierre Franco; 1505~1578)는 샅으로 돌을 끄집어내는데 실패한 어린 아이에게 궁여지책으로 하복부를 절개해 돌을 처음으로 꺼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했고 아이도 잘 나았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성공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오래 전에 방광벽에 생긴 상처는 아물지 않고 치명적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너무 위험한 수술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 수술은 아래()가 아닌 위(하복부)를 절개한다고 sectio alta (high operation)으로 알려졌다.

 사실 위험한 수술이었다. 방광을 열려다가 복막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방광이 팽창되면 하복부를 절개해도 복강을 찌를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하복부를 절개해 방광 결석을 꺼낸 프랑코의 성공, 방광에 생긴 상처도 잘 낫는 다는 사실(히포크라테스의 주장은 틀린 것), 방광 경부를 자르지만 않는다면 발기부전이나 요실금 같은 합병증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래서 수술에 나섰다. 하지만 5년 후 체즐던이 최초의 시술자라고 나서자 발끈한 것이다.   

다시 체즐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체즐던은 마레가 수술을 받은 1725년부터 3년 동안 213명의 결석 수술을 했다. 바른 손놀림 덕분에 45초만에 수술을 끝내기도 했다. 빨리 서두르다 보면 실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었다. 수술 사망률은 10%에도 못 미치는 20명이었다. 당대 최고의, 더구나 쾌속의(!) 실력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결석 수술은 위험했다. 17세기의 수술 사망률은 40%나 되었고, 이리저리 떠돌며 수술을 하던 기술자들은 자신이 어디에 칼을 대는 지도 몰랐다. 수술이 끝나면 환자가 죽거나, 평생 불구가 되는 수가 많아 시술자들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최선의 방법은 수술을 마치면 재빨리 보수를 챙기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그들의 모토가 컷앤런(Cut and Run)’이었을까.

그나마 이렇게 위험한 수술도 40세 미만의 남자만 받을 수 있었다. 남자가 40대에 들어서면 커진 전립선이 방광 앞으로 막아서 있기 때문(prostate; before+stand)이다. 여성은 해부학적 구조가 달라 수술조차 받을 수 없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스러운 죽음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9세기가 후반이 되어서 마취법과 소독법이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1847년에 처음으로 마취 상태에서 결석 제거수술을 했다. 이제부터 수술이란 것이 생목숨 내놓고 할 일은 아니게 되었다. 환자는 더 이상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의사들은 느긋하게 배를 열고 위험물을 피하며 수술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진단 기술법도 등장했다. 1876년에 최초의 방광경(Nitze's cystoscope)이 나왔고, 1895년 뢴트겐이 X-선 촬영법을 개발했다. 1929년에는 최초의 요로경(Young’s ureteroscope)이 나왔다.  

 

쇄석술(lithotripsy)의 발전

           돌을 잘게 부수면 쉽게 빠져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암모니우스(Ammonius)가 샅을 절개해 들어가 방광 안에서 큰 돌을 갈고리로 집어 잘게 부수어 꺼냈다고 한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의사들은 요도를 통해 방광 안으로 기구를 밀어넣은 다음 돌을 부수고 방광을 세척했다. 1824년에는 시비알레(Jean Civiale; 1792~1867)가 알 자라위의 쇄석기인 미챠브(Michaab)를 개량해서 돌을 깼다.

바바리아의 의사 겸 천문학자인 그뤼튀센(Franz von Gruithuisen; 1774~1852)은 요도를 통해 곧고 긴 관을 집어넣은 다음, 쇠 고리를 그 안에 넣었다. 관의 끝에 튀어나온 쇠 고리를 이용해 방광 결석을 붙잡아 외부에서 드릴 활(drill bow)을 켜 돌을 부수었다. 이후로 드릴, 망치, 나사 등등의 다양한 쇄석기구들이 등장했다.  

1878년에 하버드의대의 비글로우(Henry J Bigelow); 1818~1890)는 방광을 물로 가득 채우고 전신 마취 하에서 돌을 분쇄하여 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런 시술은 ‘litholapaxy’라 불렀는데 우리말로는 추석술(抽石術)이다. 결석 제거술의 사망률이 25% 에서 2.4%로 급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광학 기술의 발전으로 방광경이나 요로경 같은 내시경을 이용해 돌을 정확히 집은 후 분쇄하는 기술로 발전했다. 이렇게 몸 안에 기구가 들어가 돌을 깨는 시술을 체내 쇄석술(Intracorporeal Lithotripsy)이라 한다.

1980년에 사상 처음으로 몸 밖에서 발생시킨 충격파를 이용해 몸 안의 결석을 부수는 기계가 등장했다. 이제는 개복 수술도, 심지어는 내시경이나 쇄석기를 밀어넣을 필요도 없어졌다. 이것이 체외충격파치료기(ESWLÒ;Extracorporeal Shock Wave Lithotripsy) 이다. 이제 비뇨계 결석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   

 

 

체외충격파치료는 항공기에서 원리가 발견었다. 독일 항공 공학자인 도르니에(Claude Dornier; 1884~1969)는 금속제 항공기 제작 연구를 하던 중, 비행기가 초음속 수준에 다다르면 충격파가 생겨 금속으로 만든 동체에 미세한 손상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원리를 이용해 결석을 산산조각내어 소변으로 자연 배출되도록 만드는 의료기가 바로 체외충격파치료기다. 1980년에 임상에서 쓰이기 시작해 지금은 결석 치료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덕분에 이제 결석 제거를 위해 개복 수술을 하는 경우는 전체의 4% 미만이다.  

 

유명한 환자들

           11세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는 수술을 받고 2년이나 살았지만 재발되어 죽었다. 나폴레옹도 중년 이후로 방광 결석으로 고생했다. 특히 러시아 원정(1812) 중이던 모스크바 인근의 보로디노 전투에서 결석 때문에 전장에 나서지도 못하고 원격 지휘를 하는 바람에 병력의 3분의 1을 잃고 말았다. 작은 돌 하나가 그의 판단력에 영향을 끼친 것을 아닐까?

조카인 나폴레옹 3세도 환자였다. 이미 1860년경에는 심각한 지경이었고, 1869년에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에도 불참할 정도가 되었다. 프러시아-프랑스전쟁(1870~1871) 때는 기저귀를 차고 말을 탈 정도였고, 패전 후 런던에서 지내다가 1873년에 영국 의사에게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후 3일 만에 죽었다.     

그 외에도 미켈란젤로,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1, 러시아의 표토르 대제, 프랑스의 루이 14, 영국왕 죠지 4, 영국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 철학자 베이컨, 과학자 뉴턴,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 영국 의사 의사 하비, 네덜란드 의사 보어하베, 이탈리아 해부학자 스카르파, …. 등이 결석 환자들로 기억된다.

 

마레는 어떤 수술을 받았을까? 음악에 대한 설명에는 수술기구들을 보고 놀란다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보면 다도구 수술일 것으로 보인다. 16세기가 되면 소도구수술은 다도구수술로 대체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마레는 베르사이유 궁정의 음악가였고 볼리외도 베르사이유에서 활동했다. 혹시 볼리외가 마레를 수술했을까? 아닐 것이다. 마레가 수술받은 1725년에 볼리외는 이미 죽었으니까. 대신 런던에 살았다면 45초 만에 수술을 끝내주던 체즐던에게 몸을 맡길 수는 있었을 텐데.

다행히 마레는 잘 나았다. ‘회복을 의미하는 발랄한 후속곡 <Les Relevailles>을 붙여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경과가 좋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3년을 더 살았다. 72세에 세살을 뜬 마레는 장수한 축에 속한다.

솔직히 말하면 마레의 음악이 귀에 속속 들어오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3~4분 남짓의 <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는 긴장감, 공포감, 살떨림, 두근거림, 극한의 고통이 온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오금이 저릴 정도다. 그래서 의사들이라면, 특히 비뇨기과 의사들이라면 꼭 들어보시길 권한다.


 

 

참고문헌

1)   메스를 잡다(under the knife by Arnold van de Laar; Onder Het Mes, 2014)/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제효영 옮김/을유문화사/2018

2)   비행의 시대/장조원 지음/사이언스북스/2015

3)   삽화로 보는 수술의 역사(The Illustrated History of Surgery/2000)/쿤트 헤거 지음/김정미 옮김/이룸/2005

4)   역사를 바꾼 31명의 별난 환자들(an Alarming History of Famous and Difficult Patients/1997)/리차드 고든 지음/김철중 옮김/에디터/2001

5)   역사를 바꾼 놀라운 질병들(An Alarming History of Medicine by Richard Gordon, 2002)/리차드 고든 지음/최상전 옮김/에디터/2005

6)   Wikipedia

7)   Wellcome Collection

8)   Surgery, note by note: Marin Marais’ 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James L. Franklin. <http://hekint.org/2017/01/30/surgery-note-by-note-marin-marais-tableau-de-loperation-de-la-taille/>

9)   Lithotripsy: a historical review/Rabie E. Abdel-Halim. http://hekint.org/2017/01/29/lithotripsy-a-historical-review/>

10) The History of Urinary Stones: In Parallel with Civilization. ScientificWorldJournal. 2013; 2013: 423964. Published online 2013 Nov 20. doi:  [10.1155/2013/423964]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856162/>

11) Evaluation of Extracorporeal Shock Wave Lithotripsy (ESWL): Efficacy in Treatment of Urinary System Stones/Dzelaludin JunuzovicJelena Kovacevic PrstojevicMunira Hasanbegovic, andZahid Lepara/Acta Inform Med. 2014 Oct; 22(5): 309–314. /Published online 2014 Oct 29. doi: [10.5455/aim.2014.22.309-314]

12) The History of Lithotomy and Lithotripsy/Arnott Demonstration delivered at the 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ngland/Sir Eric Riches, M.C., M.S., F.R.C.S./1967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312308/?page=1>

13) ‘Crushing the stone’: a brief history of lithotripsy, the first minimally invasive surgery./Harry W. Herr/ BJU International, 2008<https://doi.org/10.1111/j.1464-410X.2008.07639.x>

14) Stones and Obstruction/ <http://www.collectmedicalantiques.com/gallery/stones-and-obstruction>

15) 도르니에 메드테크 홈페이지 <https://www.dornier.com/about-us/#history>

출처디아트리트 VOL. 18 NO.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