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정책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은 정책의 방향보다 정책 결정 과정에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의료계와 정책학계는 정부가 의료현장의 의견을 정책 설계 초기부터 반영하고, 신뢰와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의료개혁을 추진해야 지속 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11일 대한의사협회 제43차 종합학술대회 ‘의료정책2’ 세션에서는 의료계, 정책학계 수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 보건의료정책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의사협회 김택우 회장은 먼저 정부정책 결정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책이 확정된 뒤 의견을 듣는 방식이 아니라, 정책기획, 설계 초기 단계부터 의료계가 참여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현재는 복지부에서 이미 정책이 결정된 후 위원회에서 논의를 하는 구조”라며 “내용이 결정된 시점부터 의료계에서 분석하고 찬반을 논하게 돼, 의사단체가 정책에 반대만 하는 집단처럼 비쳐진다”고 지적했다.
또 정책을 설계하는 전문가와 실제 임상현장을 아는 현장전문가는 분리돼야 한다고 했다. 예방의학과 등 정책 전문가가 정책 초안을 마련하더라도, 이후에는 임상현장 전문가들이 실행가능성을 검토하고 시물레이션하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단기적인 정책이 아닌 장기적인 보건의료 정책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김 회장은 의료전달체계와 의료인력, 재정, 미래의료를 아우르는 5~10년 단위의 국가 보건의료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김 회장은 “보건이 복지수단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고령화로 인해 복지지출이 급증하는 현 구조에서는 보건의료에 대한 투자는 계속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며 보건부를 분리∙독립해 전문성, 예산, 인사 등에 대한 독립성을 확보하거나, 대통령이 의료정책을 직접 챙길 수 있도록 ‘보건의료 수석’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의료정책이 흔들리지 않도록 대통령 직속 민∙의∙정 위원회 설치도 제안했다. 김 회장은 “노∙사∙정 위원회처럼 의료계와 국민, 정부가 함께 국가보건의료 정책을 논의∙결정하고, 그 결과을 모두가 수용할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 구조가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김 회장은 ‘정책의 종착점은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훌륭한 의사를 양성해 국민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려면, 숫자 중심 정책보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정책이 진행돼야 한다”며 “지역도 강제적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 의사들이 스스로 가고싶어지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한의학회 이진우 회장은 의료개혁의 출발점은 정부와 의료계간의 ‘신뢰회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료계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정부가 의료계를 정책의 ‘대상’이 아닌 ‘파트너’로 존중해야 한다”며 “의료계 역시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 정책제안, 협력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형식적인 의견수렴을 넘어 실제 정책에 의료계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여러 법안들이 통과되기 전에 예상되는 부작용 등을 강력하게 전달했지만, 기존에 정해졌던 방향대로 법안이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의례적인 의견 수집이나 위원회의 소집이 아니라 의료계의 의견을 경청하고, 일부라도 정책에 반영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뢰회복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지역의사제와 국립의전원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이 회장은 “10년 후에나 인력이 배출될 사업”이라면서 “이후 의무복무 기간 동안에는 지역에 7000명~1만여명이 머물게 되는데, 이때 발생할 수 있는 인력과잉에 대한 대책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지역의료 문제는 현재의 문제인 만큼 “정책을 급하게 추진하지 말고 의료계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보완해나가야 한다. 현재 지역의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단기 대책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전했다.
정부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소통과 경청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정책학계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국정책학회 이석환 회장(국민대 행정학과)은 정책의 성공 여부는 신뢰와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며, 충분한 공론화와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좋은 목표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라며 합의 여부보다 충분히 의견을 표명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짚었다.
정책 추진과정에서는 시행 이후의 결과까지 충분히 예측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의견을 같이 했다. 이 회장은 “AI 등을 활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제도 시행 이후 의료체계와 국민 건강, 의료인력 변화 등을 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한병원협회 유경하 회장 역시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정책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유 회장은 “1990년대부터 정부를 향해 저수가 체계로는 소아청소년과가 무너질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지만, 정부는 복지로 방향을 전환해 6세미만 입원환자 보호자 제도 등을 내놨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처럼 많은 정책과 지원을 내놓고 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시기가 늦었기 때문”이라며 “한번 시기를 놓치면 그 이후에 나오는 정책들은 의도가 좋아도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이형훈 차관은 “의료계와 정부는 정책의 파트너”라며 “정부도 전문가와 현장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마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대화하고 경청하며 소통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