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의료기관을 상대로 ‘신용불량자’가 돼가고 있다. 정부가 예방접종을 위탁한 의료기관에 수개월째 대가를 지급하지 못하는 관행은 올해도 반복됐다.
경기도 양주시는 9월 시행된 국가예방접종 건부터 내년 예산이 배정될 때까지 접종비 지급이 미뤄진다고 통보한 것이다. 민간이라면 ‘채무불이행’으로 불릴 상황이 행정편의라는 이름 아래 당연시되고 있다.
이제 9월부터 시작된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면 전국 다수의 보건소는 예산 부족이라는 이유로 접종비 지급을 또 미루게 될 것이다.
1년 중 3~4개월, 전체 접종의 1/3 기간 동안 의료기관은 국가의 ‘외상 접종’을 떠맡고 있다. 보건소들은 “예산이 소진되어 부득이하게 내년 예산이 배정될 때까지 지급이 어렵다”며 해마다 같은 답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는 법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행정 편의적 관행일 뿐이다.
현행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과 질병관리청 고시 예방접종업무의 위탁에 관한 규정 제10조는 “예방접종비용은 인정 통보 후 15일 이내 지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예산 부족 시 지급을 유예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청은 매년 발간하는 국가예방접종사업 관리지침에 “예산의 부족 등 부득이한 사유로 해당 기한까지 지급이 어려운 경우 제외”라는 문구를 추가했는데 이는 상위 고시의 강행 규정과 충돌하며, 행정편의를 이유로 기한을 무력화한 법적 위임 범위를 벗어난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법적 부담 등으로 2021년 성남시 중원구에서는 관련 소송 직후 비용을 지급하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었다.
민간 계약에서는 너무나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정부 및 지자체가 체결하는 모든 공공계약에서도 지연이자 규정은 존재한다. 국가계약법 제15조와 시행령 제59조는 “기한까지 대가를 지급하지 못한 경우, 그 지연일수에 따른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정부가 계약 상대방에게 비용을 늦게 지급하면 지연이자를 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유독 국가예방접종 위탁의료기관만이 이 원칙의 예외 취급을 받고 있다.
EU는 Late Payment Directive를 통해 모든 공공기관이 30일 내 대금 지급, 초과 시 법정이자(기준금리 + 8%) 및 회수비용을 지급하도록 의무화했다. 미국의 Medicaid Prompt Pay Rule 역시 의료기관 청구의 90% 이상을 30일 내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주정부 지연 시 이자를 부과한다. 선진국에서는 ‘지연 지급’ 자체가 위법이며, 지급 지연에는 자동으로 이자가 붙는 것이 상식이다. 유독 한국만이 필수의료 영역에서 ‘지연 지급’을 행정절차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아청소년과는 2009년 이후 정부 위탁으로 국가예방접종(NIP)을 수행함으로써 ‘감염병 예방을 통한 국민 건강 증진’이라고 하는 공공보건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필수예방접종이 국가예방접종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손실율이 늘어나고 낮은 시행비 책정으로 운영이 쉽지 않은 가운데 정작 그 접종비 마저도 3~4개월씩 밀리다 보니 현장에서는 국가예방접종의 소아청소년과 위탁을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현 정부는 필수의료체계를 살리겠다고 했고, 보건의료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말했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의료기관은 정부의 하청이 아니라, 정부를 대신해 아이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필수예방접종을 수행하는 파트너다. 정부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의료기관에 접종비 지급 기한을 어길 권리가 없으며, 지급 지연 시 법정이자 지급, 자동정산시스템 도입, 미지급 현황 공개제도 등 실질적인 보호 장치를 즉시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예산 부족 시 보완 수단으로써 지방재정법 제43조에서는 예비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고, 국가예방접종은 지자체 재량이 아니라 감염병예방법 상 ‘국가위임사무’이며, 지방재정법상 예비비 의무계상 및 필수사업임을 감안할 때 법이 정한 예비비는 바로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장치다.
국가예방접종비의 지급 지연은 단순한 회계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정부가 먼저 신뢰를 지켜야 국민이 따를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예산 핑계’가 아니라 책임있는 행정이다. 예산 소진을 이유로 한 ‘외상 행정’을 즉시 중단하고, 필수의료 붕괴를 막을 의지가 있다면 ‘정시 지급’과 ‘지연이자 부과제도’를 즉시 도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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