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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의학을 소비하는 시대

은혜산부인과 김애양 원장

“대체 왜 주사를 안 놔 주는 거예요?”


진료를 마친 환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염증이 그리 심하지 않으니까 소독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다시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로 주사를 원하며 투덜투덜 혼잣말을 한다.


“참 이상한 의사도 다 있네. 주사를 놔달라는데 왜 환자 말을 안 듣지?”


비단 주사뿐이 아니다. 진료실에는 약을 더 많이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도 많다. “항생제를 지어 달라고요.” 라든가 “왜 약을 삼 일치만 주죠? 다른 병원에선 일 주일치도 처방해주던데…….” 라며 나의 진료에 반기를 드는 환자들을 만나면 진땀을 빼곤 한다.


물론 약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 긍정적인 예도 많지만 약물이 과용되거나 남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요즘은 의료보험 덕택으로 약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단 점이 약물 남용의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내가 약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건 실제로 무분별한 약물 복용으로 무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신혼 초에 미국에 계시던 시부모님이 신혼집에 방문한다는 날이 다가오던 때였다. 새색시이자 맏며느리로서 나는 침상이며, 식단이며, 여러 가지를 철저히 준비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어른들 눈 밖에 나거나 흠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은 항시 눈사람처럼 부풀기 마련이라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항우울제를 먹어 보기로 했다. 그걸 먹으면 모든 우울함이 일시에 사라지고 웃음까지 깔깔깔 저절로 나올 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웬걸, 약효는 끔찍했다. 연두색 캡슐 하나를 복용했을 뿐인데, 내 몸은 마치 다른 사람의 육신처럼 내 의지와 전혀 다르게 떠도는 것 같았다. 허수아비가 되어 허공에 붕 뜬 것과도 같고, 육체가 낱낱이 분해되어 사지가 각기 따로 노는 느낌도 들었다. 꼬박 하루가 지난 후에야 해체되었던 나의 몸과 정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토록 작은 약물 하나가 50Kg도 넘는 내 몸을 제 멋대로 지배하다니….


나중에 정신과 의사에게 물으니 내 마음대로 집어먹었던 그 약은 여러 종류의 항우울제 가운데 내게 정반대로 작용하는 약임을 알게 되었다. 그 체험 이후에 나는 약물 사용을 극도로 제한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하필 그런 내게 환자들은 더 많은 약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애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약을 좋아하는 것일까? 주변에서 보면 중년 이후에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에 대한 약을 한두 가지씩 복용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비단 치료제뿐 아니라 몸에 좋다는 종합 비타민이나 자양강장제를 열심히 복용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아마 우리는 의학의 소비를 권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을 오로지 과학과 기술력으로 이해하려는 연구로 인해 인체에게 일정한 약만 투여하면 절대로 아프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희곡이 있다. 폴란드의 풍자 작가 스와보미르 모르제크의 『미망인들』이다. 이 연극에는 여러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술집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급사하는 남자도 있다. 그가 술에 신경안정제 ‘발레리안’을 타 마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웨이터가 무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샴페인과 발레리안… 만일 이 자리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얘야, 똑똑히 보렴. 나쁜 결과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뭔가를 배우고 깨우칠 수 있는 법이란다! 기억하려무나. 술을 마실 땐 절대로 약을을 복용해서는 안 된단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죽음이 어떻게 삶을 지배하는지 드러내어, 삶과 죽음이 마치 외투의 안과 밖처럼 공존한다는 걸 말하려 한다. 그런 중에 신경안정제와 술을 함께 마시고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인물은 사뭇 인상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발레리안’이란 약은 ‘쥐오줌풀’ 뿌리로 만드는 신경안정제이다. ‘쥐오줌풀’은 우리나라 산야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야생초이고, 뿌리에서 치즈 냄새나 혹은 씻지 않은 발 냄새가 난다고 해서 이토록 야릇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낱 들풀에서 만들어지는 약물이 치사제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약을 잘못 복용하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더욱이 서로 다른 약물이 상호작용을 통해 치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약물을 한 알 한 알 복용할 때마다 조심하기를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