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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잊을 수 없는 아이 (장애자로 산다는 것)

김인호소아청소년과의원 김인호 원장

민준의 나이가 벌써 열아홉 살, 청년이 되었다.
출생 25일 만에 보송보송한 우윳빛 피부로 평화롭게 누워 첫 진찰을 받을 때가 생생한데 세월은 공평한 것인가.


그날... 그의 신체 계측 백분위 수치는 표준이었다. 그러나 아기 포대기를 홀랑 벗기고 진찰대에 옮길 때 내 손으로 느껴지는 그의 중량감은, 직감적으로 뇌신경 계통에 문제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척주와 사지의 근무력(筋無力)과 경직성이 뇌성마비 중증이었다.


내 표정만 살피던 젊은 부부는 마치 공판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불안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상태를 묻는 아기 아빠는 거의 울상이었다. 신생아 운동반사 반응 등을 정밀 진찰하면서, 난 이 결과가 젊은 부부에게 줄 수 있는 충격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하고 내심 걱정을 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흔히 있는 경우인 것처럼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운동신경에 장애가 있으니 종합검사를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집에서도 갓난아이의 행동과 반응에 뭔가 이상해 했던 부부 역시 낙담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때부터 민준의 성장은 내 인생의 고리가 되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리 민준이 예방주사 맞으러 왔습니다.” 늘 밝은 미소로 민준이 아버지가 진찰실 문을 열며 인사를 한다. “민준이가 왔습니까?”하며 대기실로 나가 보니 그가 보이지 않았다. “제 차에 있습니다. 이제 이층까지 안고 올라오기에도 힘드네요.“


간호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가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성인이 된 민준이가 독감을 예방하려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교통 체증을 뚫고 온 것이다. 봉고차 안은 침대가 깔려 있고, 팝송이 흘러 나왔으며, 침 냄새가 물씬 풍겨 내 후각을 자극했다.


“민준이 왔구나! 오랜만이야!” 나는 최대한 밝은 소리로 민준이를 부르며 다가갔다. 민준이도 아는 체를 하며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린다. “웅엉 우우우... 웡웡우..”


“반갑다고 인사 하는데요.”하며 아버지가 해독해 준다. 민준이가 손을 내밀며 허공을 휘저어, 나는 덥석 두 손을 잡고 “우와! 우리 민준이 손목 힘이 아주 부드러워 졌는데?”하며 말했다.


내 손보다 훨씬 커버린 그의 손은 이미 굳어 있다. 청진기로 들려오는 심박동은 피 끓는 청춘의 힘이 솟구치는 듯 청춘의 활력으로 역동적이었지만 가슴뼈와 척추는 꼽추처럼 구부려져 허약하다. 두상(頭像)은 앞뒤로 길고 얼굴은 백옥처럼 하얗다. 눈동자는 초점 없이 충혈되고, 벌어진 입가로 연신 침이 흐른다. 팔다리는 가위처럼 접혀져 뻣뻣하고, 무릎 아래는 검은 털이 숭숭하다. 의사표시라도 하려 하면 온몸을 힘주어 비튼다. 숨 쉬는 소리는 가래가 고여 그렁그렁한다.


“선생님이셔! 너 불편한 데 있으면 가리켜 봐.” 아버지가 웃으며 엉덩이를 건드리자 민준이가 킁킁대며 머리와 손을 배 아래쪽으로 향한다. 나는 의아해 하며 “어디가 아퍼? 여기?”하며 사타구니를 촉진해 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민준이의 성기가 발기된 채 굳어 있어 순간적으로 성호르몬 자극 질환을 의심했으나 “아! 너 오줌 마려운 거구나. 그래 여기 변기 주마.”하며 아버지가 얼른 소변기를 갖다 대니 시원하게 배뇨를 한다. 이내 성기는 부드럽게 줄어들고 민준이는 편안해 하며 음악소리를 크게 튼다.


주사를 찔렀으나 별 아픔도 없는 듯 눈앞의 디엠비(DMB) 화면과 음악을 보고 들으며 금방 평온해진다. 이제 성인이 된 민준이가 대견스러워 아버지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뜻을 전하자 “차라리 자라지 않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더 힘들어 지는데요.”하며 웃는다.


업보로 여기며 민준이를 키운다는 아버지는 아무리 멀어도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도 민준이 탓으로 돌린다. 안전장치를 점검한 후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없다. 그냥 평상인의 방문일 뿐이었다.


민준이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며칠을 보낼 때, 민준 부모의 지극정성은 의사들을 숙연하게 했다고 한다. 어릴 때 아파서 올 때마다 때 묻지 않은 밝은 웃음으로 민준이를 이 세상 하나뿐인 보석처럼 다루는 엄마를 보고 잘 견뎌내는구나 여겼다.


민준이네는 채소 도매상을 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라고는 민준이뿐이다. 엄마는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하며 장사하는 여자치고는 순진한 편인데, 민준이가 경련을 하거나 열이 날 때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두 팔로 큰 덩치의 뻣뻣한 민준이를 안고 이층 계단을 뛰어 올라와 대기 순서도 없이 “원장님! 우리 민준이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듯 소리쳐 나를 놀라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축복과 기대 속에 태어난 아이. 하지만 방긋거리는 웃음도 없는, 늘 경직된 사지와 멀뚱한 표정의 아이. 뒤집고, 기고, 한 발작 걸음을 뗄 때의 경이로움을 포함해, 아이의 성육과정 속의 기쁨과 놀라움의 탄성 한 번 질러 보지 못한 부모. 정상아가 될 희망이란 거의 없는 그 암울함. 운명적 업보라고 단정하며 사는 그들의 간난(艱難)과 신고(辛苦)는 어느 정도일까. 그러면서도 아이의 청장년기를 지켜가는 그 사랑과 끊임없는 보살핌에 나는 경외감마저 생겼다.


민준이가 사춘기 성상을 보일 즈음 난 민준이 엄마에게 장애자 보육원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 걱정스레 물은 적이 있다. “그 시기는 지났습니다.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주 먼 보육원에 보내려고 마음먹은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불안해져 떨어질 수가 없어요.” 그 후에도 한두 번 더 슬쩍 물어 볼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이 없이 “그냥 사는 거죠 뭐”하며 담담하게 답변했다.

 
민준이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즐긴다고 한다. 김연아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수영선수 박태환의 건강한 어깨와 물살을 가르는 힘찬 몸놀림에, 소녀시대의 리듬과 현대무용의 현란함에 빠져들 때가 많다는 것이다. 또 축구나 야구도 정확하게 때를 마춰 뉴스를 본다며 “그럴 때 보면 우리 민준이의 기억력이 뛰어나요. 보는 데 정신을 집중해서 밥 먹을 때도 거르구요.” 건강한 신체가 갖는 예술과 스포츠를 좋아하는 민준이는 그런 프로그램 속에서나마 마치 자기가 그 주인공처럼 느껴져 행복감에 젖을 것이다. 부럽거나 아쉬워 할 것 없이...


요즘 자식 교육을 위해 위장전입을 하거나 특목고, 과학고 등에 부정입학을 시키려 편법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친구들의 자녀 교육과 비교하며 뒤질세라 “세상이 다 그런데...” 하며 특수 과외를 시킨 적이 있다. 비교하고 기대하는 마음은 희망이고, 그 희망은 꿈이 아닌가. 그러나 부모의 자식 욕심이 가족의 행복인가 하는 명제 앞에 민준이네를 보며 나의 저질스러움에 한동안 너무 우울했던 적이 있다.

장애자로 산다는 것. 그것이 천형(天刑)과 같은 아픔을 주는 것은, 우리 사회가 만드는 적자생존의 룰(rule)에 벗어날 수 없는 속성 때문이리라. 출발점부터 아웃사이더인 민준이와 그 가족의 미래는 어떤 존재인가. 그냥 살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들의 잣대는 오히려 더 편견일 수 있다.


비교 대상과 편견이 없는 파라다이스는 과연 존재할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 그것은 외딴 섬에서 자연과 더불어 고독하게 사는 삶뿐일까. 사랑으로 충만한 유토피아가 인류 공동의 목표라면, 불행으로 출발한 출생부터 생명가치를 축복으로 이끌 수 있는 베풂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인호 원장은 인제의대 서울백병원 소아과 전공하고 인제의대 소아과 조교수를 역임했고 , 대한소아과학회 보험이사와 의약분업대책위원장과 서울 송파구의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시의사회 법 정관 대의원, 대한의사협회 예결산 대의원, 의원문제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