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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뛴다는 말

정의석 (상계백병원 흉부외과 교수)


“드라마도 영화도 아닌, 병원의 진짜 풍경”

병원은 언제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긴박하고 애달프고 냉혹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다. 대동맥이 터진 채 한밤중에 응급실로 실려오는 환자, 숨소리를 크게 내는 것조차 허락지 않는 수술장의 긴장과 고요, 혼수상태로 인공호흡기를 낀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기도하는 보호자들, 긴 시간의 투병으로 쇄약해진 환자들이 신음하는 병동,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의 틈새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의료진.

언젠가 스러질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병원은 그 자체로 삶의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부각되는 장소일 수밖에 없다.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질병이나 의학 관련 뉴스가 언제나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이유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환자나 보호자가 되어 병원을 찾지 않는 한, 병원의 진짜 풍경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병원은 모르고 살수록 좋은 곳이라 믿고, 이해당사자가 아닌 한 알 필요가 없는 곳으로 병원을 꼽는다.

현대인에게 병원은 삶을 시작하는 장소이자 삶을 마감하게 될 유일한 장소로 기능하고 존재한다. 누구나 언젠가 병원에 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적나라한 인간의 풍경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 병원이 일이고 삶인 한 흉부외과 의사의 안내에 따라 병원의 내부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아직 많은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지금이,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심장이 뛴다는 말』은 종합병원 흉부외과 의사인 저자가 전공의 시절부터 기록해온 일기에서 출발했다. “중환자 담당 스케줄이 시작되기 직전에 몇 가지 결심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객관화해서 돌아보고 생각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어서였다.”(「중환자실」) 매일 수술장과 중환자실, 응급실을 뛰어다니는 사이에, 잠들면 안 되는 밤이나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저자는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 속 병원은 극한의 상황, 극단적인 상황, 극적인 상황이 매일매일 무한 반복되는 곳이다. 엄청난 피와 땀, 비명과 눈물이 페이지 갈피마다 새겨져 있다. 돈 때문에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하려는 환자가 있고, 무지와 고집으로 죽음에 이르고 마는 환자도 있다. 가망 없는 환자를 붙들고 놓지 못하는 가족이 나오고, 가망 없는 환자를 죽게 했다고 발길질을 날리는 보호자가 나온다. 그리고 능력에 대한 불안과 무거운 책임감 사이에서 번민하는 의사가 언제나 그들 속에 있다. 기적이나 감동은 드물게만 일어난다. 어떠한 꾸밈도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짜 병원 풍경만이 담겨 있다.

“생명의 마지막 희망을 움켜쥔 사람들”

책에는 저자가 심장 전문의로 만난 여러 환자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모두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들 이야기다. 사고인 경우도 있고 지병이거나 노환인 경우도 있지만, 심장이 터지고, 대동맥이 찢어지고, 심장 혈관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환자들은 하나같이 죽음의 문턱에서 병원에 실려온다. 그러한 환자를 매일 낮, 매일 밤, 만나고 수술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의사는 환자가 살아나면 기뻐하고 돌아가시면 자책한다.

죽을 수도 있는 어려운 수술을 두 번이나 함께한 환자와의 인연(「인연」), 10번의 수술과 50일의 중환자실 입원, 1년의 재활치료를 이겨내고 결국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은 비행기 조종사(「비행」), 인공판막 수술을 받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모두를 조마조마하게 했던 할아버지(「희망」), 결핵으로 폐를 잃었지만 힘겨운 수술을 이겨내고 끝내 삶을 되찾은 젊은 엄마(「오버 더 레인보우」) 등의 이야기는 얼핏 흔하고 진부한 최루성 드라마를 닮았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이런 해피엔딩이 현실에선 결코 흔하지도 진부하지도 않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많은 경우, 환자들은 응급실을 거쳐 수술실로, 그다음 중환자실로, 그리고 마침내 병동으로 가게 되면 천만다행이다. 사실 병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응급상황은 그 중간쯤 어디선가 멈춰버리는 이야기가 더 흔하다. 혹은 살아나더라도 더 많은 근심과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상황을 10년 동안 매일 같이 맞닥뜨린 저자는 깨닫는다. “두렵고 무서운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같은 건 어차피 없다. 살아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더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뿐.” (「질문」)

『심장이 뛴다는 말』이 의미심장한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 책에는 우리가 만일 인터넷 기사로 그런 사연을 보았다면 ‘어리석다’ ‘한심하다’ ‘무식하다’ ‘노답이다’ 등의 댓글을 달고 싶어지는 상황들이 넘쳐난다. 폐에서 종괴가 발견되었는데 안수치료를 받겠다고 병원을 탈출해 20일 만에 저세상으로 간 환자(「2005년 3월 7일」), 동호회에서 처음 만나 술을 마시고 싸우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칼로 찔러 결국 죽게 만든 사건(「세 남자」), ‘편히 가시길 바란다’며 50대인 어머니의 수술을 포기하려는 아들(「2008년 5월 4일」), 메르스 환자의 치료책을 찾기 위한 흉부외과 기자 간담회를 자신의 카페에서 하지 말라며 일방적으로 예약을 취소해버린 카페 사장(「혐오」), 의식불명 상태로 심장이 멎어가는 아버지의 임종을 딸이 지켜볼 수 있도록 시간을 끌어달라는 보호자들(「익숙함에 관하여」) 등등. 그 모두가 몹시 소란하고 한없이 적막한 삶의 풍경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환자 또는 보호자가 되기 전까지는 결코 질병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의사의 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는 정말 그 순간이 닥쳐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알지 못한 채 허둥거릴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토록 생생하고 치열한 의사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26개월 동안 다섯 번 넘게 수술을 받으면서도 병원 복도를 뛰어다니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렇게 살아 있었던 한 아이의 죽음(「26개월」)을 그저 실패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권리와 존엄, 가치와 신념,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아파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여볼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실려오는, 병상을 지키는, 환자를 수술하고 돌보는 모두를 향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세상에 죽어도 좋은 것은 없어요. 돌아가시지 않게 하려고 수술하는 것이고요.”(「죽어도 좋아요」)

“의사, 그 또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는 의사라는 ‘전문직’에 대해서 상반된 두 가지 태도, 즉 경외심과 두려움, 세속적 선망과 평가절하의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자신의 몸과 목숨을 맡길 때 의사는 절대적 의지와 신뢰를 보내는 존재고, 어떠한 경우에도 의사가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한편,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의 환자와 가족에게 의사는 원망과 절망을 투사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의사는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숭고한 직업이 된다.

하지만 의사라는 직업과 병원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수술이나 치료를 권하는 의사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말하고, ‘내 몸은 내가 잘 안다’는 말로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논하며, 병원과 의사에게 불신과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이러한 현상은 의료 기술이 진보하고 의학 지식이 보편화될수록 더욱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결과, 저자처럼 생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는 노동의 강도에 비해 보상이 적은 극한 직업이 되었고, 해마다 신규 의사 수가 줄어드는 ‘멸종위기과’가 되어가고 있다(「멸종위기종」). 또 메르스가 창궐해 온 나라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에크모 장비를 이용해 목숨 걸고 환자를 치료한 흉부외과 의료진은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에크모」).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각자의 처한 상황에 따라서, 때에 따라서, 입장에 따라서, 다르게 들리고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고민과 질문들에 답하려 애쓰며, 자신의 자리는 언제나 아파하는 환자 곁이라고 믿는, 그러한 의사들이 아직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혹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잘못될까봐 밤새 환자 침상 밑에 쪼그려 앉아 약을 주는 의사, 돌아가실 뻔한 환자가 살아나 아프다며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의사, 아픈 환자들이 서운해할까봐 미용실에도 가지 못하는 의사, 언젠가 우리가 가야 할 병원에서 그런 의사를 만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