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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헤파린 파동'...왜일까?

지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2006, 2007)

 

 

 지금 미국에는 헤파린heparin 파동으로 어수선합니다. 헤파린 주사를 맞은 환자  수 백 명이 부작용을 보여 그 중 21명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 FDA의 뒤늦은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공장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백스터Baxter International Healthcare Cooperation에서 제조한 헤파린 주사제 중 일부에서 불순물이 최고 20%나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문제의 핵심이 된 중국의 창저우 SPL()는 돼지의 내장 점막을 벗긴 후 삶는 방식으로 제조된 헤파린 원료를 공급받아 미국에 수출해온 회사로, 이번 조사에 의하면 무면허 의약품 제조회사라고 하는군요. 더욱이 최근에 중국내 돼지 전염병이 돌아 원료를 구하기 힘들게 되자 지저분하고 영세한 작업장에서 처리된 원료들이 섞여들었고, 이것이 미국내 헤파린 시장의 절반을 점유하는 회사를 통해 공급되어 대형 사고가 터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번 사고를 전해 들은 많은 의사 동료님들이 한결같이 이런 의문을 갖습니다.

 

“그런데, 헤파린이 돼지 창자로 만들어?

 

그래서 이번에는 헤파린의 오래된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려 합니다.

 

 

 

볼티모어의 헤파린

 

 

오늘날 우리 의사들이 사용하는 약물들은 우연히 발견한 것들이 많습니다. 헤파린 역시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탄생과정을 겪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의 미국 볼티모어에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15년의 어느 여름 날, 볼티모어의 기차역에 제이 맥린Jay Mclean(1890~1957)이란 스물 다섯 먹은 청년이 내립니다. 버클리대학 출신인 이 청년은 생리학에 정통한 외과 교수가 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대륙을 횡단해서 존스 홉킨스 의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못해 1년 후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맥린은 1년의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유기화학도 익히고 학비도 벌 일자리를 구했는데 마침 윌리엄 하웰William Howell(1860~1945)1 의 실험실에서 자리를 얻습니다. 하웰교수가 맥린에게 내린 과제는 뇌()조직 추출물에 석여있는 혈액 응고 촉진물질thromboplastic substance의 성분을 확인하고 분리하는 일이었습니다.

 

학비를 벌기위해 벌써부터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었던 맥린은 악취가 나는 고약한 작업을 마다않고 열심히 일해 그 해 12월에 뇌가 아닌 간()추출물에서 얻은 인지질의 일종이(heparophosphatide) 혈액 응고를 강력히 방해하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산 응고방지제 natural anticoagulant이자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헤파린heparin입니다.2 그래서 의과대학의 예비학생이었던 맥린은 헤파린의 발견자가 되었지요.

 

하지만 1918년에, 하웰은 다른 동료와 함께 헤파린을 분리했다고 발표합니다. 하웰은 헤파린을 발견한 맥린에게 자신들의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가하도록 요청했지만3 맥린은 이미 1916년에 발표한 논문만으로도 헤파린의 발견자로서의 지위를 인정받는다고 판단하여 사양했습니다. 하웰은 이후로도 헤파린이 혈우병hemophilia의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계속 헤파린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4  

 

 

1920년대 초, 하웰은 새로운 프로토콜protocol을 이용해 이전의 것과는 다른 성질의 헤파린을 분리했다고 발표했고, 1922년에 열린 미국 생리학회 연차 총회에서 이전처럼 지용성이 아닌 수용성 헤파린5 을 소개하였습니다6. 아울러 하웰은 1924년에 자신이 맥린이 발견한 것과는 다른 항응고물질을 발견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누가 최초의 헤파린 발견자인가 하는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맥린이 죽기 직전에 남긴 글을7보면 하웰에 대한 섭섭함이 잘 보입니다. 실험실에서 고된 일을 도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웰과 그 동료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을 먹으러 갔다는 언급이 나오지요. “먹는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이 안티트롬빈antithrombin을 발견했다고 알리자 “안티트롬빈은 단백질인데, 당신은 인지질 작업을 하던 중이 아니오?”하면서 “작업이 잘못되었겠지”하며 쌀쌀맞게 굴었다고도 하네요. 맥린이 분명히 ‘강력한 항응고제’를 발견했다고 해도 하웰은 처음에는 냉랭했다고 합니다. 하긴 하웰은 ‘응고를 촉진하는 물질’을 찾으라했는데 맥린은 그 반대의 물질을 찾아냈으니 그럴만도 할까요?

 

어느날, 맥린은 비이커에 고양이 피를 가득 채워 하웰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피가 굳으면 저에게 연락하세요!”하고 나왔답니다. 물론 헤파린이 들어간 피는 절대로 굳지 않았답니다. 이것은 헤파린의 효과를 증명한 시험관 검사 in vitro test와 다름없지요. 그제서야 하웰은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그 다음에는 공동으로 개의 정맥에 헤파린을 주사하는 생체 실험in vivo test을 했습니다. 개의 절개부위에 다량의 출혈이 생기는 것을 확인하여 헤파린의 효과가 동물실험으로도 확인되었습니다. 

 

 

토론토의 헤파린

 

 

하지만 누가 헤파린을 먼저 발견했는가는 사실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 다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우선 개의 간에서 아주 조금만 얻어낼 수 있는 헤파린은 너무 비싼데다가 부작용도 많아 인간에게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 조차 “헤파린을 뭣에 쓰게”하는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럭저럭 10년 쯤의 세월이 지나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토론토로 배경을 옮깁니다. 두번째 주인공은 1928, 토론토대학의 코놋연구소Connaught Labaratory의 찰스 베스트Charles Best(1899~1978)입니다. 베스트 역시 의과대학생이었던 1922년에 밴팅Frederick Banting 등과 함께 소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최초로 분리해낸 인슐린의 발견자였습니다. 베스트는 순수한 헤파린을 다량으로 만들어 혈전에 대한 효과를 동물 실험(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통해 알아보려했습니다.

 

베스트의 팀에는 유기화학자 찰스(Drs. Arthur F Charles; 1905~1972), 인슐린 생산에도 같이했던 스콧(David A Scott;1892~1971), 그리고 실험 수술을 도맡을 유능한 외과의사 메레이(Gordon Murray; 1896~1976)가 가세하여 명실상부한 ‘베스트 팀’을 이룹니다.

 

우선 찰스와 스콧은 구하기 힘든 개의 간보다 더 저렴한 원료 공급원을 발굴했는데 바로 쇠간(牛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버리는 법이 없는 쇠간은 캐나다 도축장에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헤파린도 더 많이 들어있었지요. 하지만 나중에 쇠간이 애완동물의 사료원이 되어 값이 많이 오르자 궁여지책으로 다른 조직들을 대용품으로 찾아야했습니다. 이때 허파와 창자에도 헤파린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지요. 특히 창자는 헤파린도 많고 구하기도 쉬웠지요.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소는 물론이고 돼지의 창자가 헤파린의 주된 공급원이 된 것입니다.   

 

 

 

 

쫒겨나야했던 보건대학건물8

 

 

코놋연구소에서 생산한 헤파린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맥린도 겪었던 일이지만 헤파린 생산은 아주 복잡하면서도 불쾌한 작업입니다. 공정 중에는 내장을 부패하게 두는 기간이 필요했는데 역겨운 냄새 때문에 도심에 있는 보건대학건물에서 쫓겨나 시골에 있는 농장에서 작업을 해야했으니 말이지요. 아마 맥린이 점심식사에 초대받지 못한 숨은 이유도 바로 악취가 원인일 겁니다. 냄새만큼 기분을 직접 흔들어대는 것은 없으니까요.

 

1933~1936년 사이에 헤파린의 정제는 성공하여 곧 염 용액salt solution에 녹여 사용할 수 있는 표준 건조형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덕분에 이제 토론토대학의 코놋연구소는 인슐린에 이어 헤파린의 국제적인 생물학적 표준을 또 하나 만들어내었습니다.    

 

한편, 서젼인 머레이는 새로운 헤파린을 이용하여 다양한 동물실험을 해봅니다. 헤파린이 혈관내부의 핏덩어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메레이는 이것을  피가 너무 빨리 굳어져 목숨을 위협하는 수술에 사용해볼 생각을 하게됩니다.  

1935 5, 토론토 종합병원에서 헤파린 나트륨이9 인간에게 처음 주사되었습니다. 잇따라 수 백 건의 복잡한 수술에 헤파린이 사용되어 귀중한 인명을 구하게 되고, 1937년쯤에는 새로운 헤파린은 편리성, 효과, 그리고 안정성에서도 인정을 받게됩니다. 이제 코놋의 헤파린은 개심수술open heart surgery, 장기이식수술organ transplantation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머레이가 개척해나간 인공 신장artificial kidney기술에도 필수적인 약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헤파린        

 

 

지난 70년 동안 헤파린은 우리 의사들이 아주 흔히 사용하는 혈액 응고방지제blood thinner였습니다. 신부전 환자들의 투석, 심장수술, 혈관내에 혈전이 생기는 질병들에도 헤파린은 아주 편리하게 주사됩니다.

헤파린을 사용하게되는 경우에는 대개 제일 먼저 5,000~50,000 단위를 정맥으로 바로 주사하지요. 별로 부작용를 걱정하지 않고 사용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보면 주사 후 수 분 이내에 부작용이 아주 많이 나타났습니다. 대부분은 과민반응hypersensitivity의 형태로 입안이 붓고, 구역질, 구토, 발한, 호흡곤란, 치료를 요하는 저혈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2월 이후로도 최소한 21명이 헤파린으로 목숨을 잃었으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중국산 원료가 들어간 헤파린을 수거하고 있습니다.  보건 당국에서는 우리나라에는 백스터의 헤파린이 허가만 받고 들어온 적은 없다고 말하지만 다른 제품들도 중국산 불량 원료가 들어갔는 지 유무를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독일에서는 중국제가 아닌 헤파린에서도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가 나온 것을 보면, 헤파린 주사를 맞는 환자들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10

, 이제 식당에 가면 나오는 간 천엽이나 곱창도 눈여겨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자연산 헤파린의 보고(寶庫)라는 말을 들으니 앞으로는 그냥 넘기기 어려울 것 같네요.

 

 

 1 트롬빈thrombin을 분리해냈고 그것이 혈액 응고에 중요한 기능이 있음을 밝혔다. 오슬러의 뒤를 이어 1899

    이후로 12년간 존스 홉킨스의대의 학장을 지냈다.

 2 포유동물의 간에 많이 있기에 헤파린heparin이라 이름지었다.

 3 Two factors in blood coagulation, heparin and Proantithrombin Am J Physiology 1918-19,    47:328-341

 4 의학사 산책/JH 콜로

 5 인 성분이 없는 유황함유 다당류였다.

 6 이미 수용성에 대해 주목했던 1916년 맥린의 논문을 레퍼런스 목록에 넣지 않았다.

 7 The Discovery of Heparin, Jay McLean, M.D. Circulation 1959;19;75-78 

8 Aventis Pasteur Archieves

 9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헤파린도 heparin sodium으로 Heparin

10 2008년 4월 9 FDA의 발표에 따르면 OSCS(over-sulfated chondroitin sulfate)에 오염된 헤파린으로 미국에서 15개월 동안 사망한 환자의 수는 103명이다. 미국과 일본 이외에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에서도 다른 제조사의 헤파린에서도 불순물 오염이 확인되어 수거되었다. 3 18일에 발표된 우리나라 식약청의 보고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4개사의 제품이 전량 회수되어 폐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