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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Proteus mirabilis; 놀라운 프로테우스

박지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2006년, 2007년)

 

 

 

 

 

 

 

지긋지긋한 참호      

 

 

 

영화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를 본 의사라면 누구라도 학창시절에 단골 시험문제였지만 지금도 아리송한 참호족()trench foot과 참호열()trench fever를 기억할 것이다. 트렌치 코트trench coat로도 유명한 참호(塹壕)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퇴각하던 독일군들이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기 위해 땅을 판 것으로 시작된다. 독일군들이 몸을 땅에다 묻고 버티자 이에 대응하여 연합군도 땅을 파는 것으로 대응했는데 이것이 참호전()의 시작으로 대략 1914 9월의 일이다. 하지만 독일군들이 지리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땅 팔 곳을 정했더라면 이후에 잇따를 불필요한 재난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당시 참호진지로 구축된 전선은 북해에서 시작하여 스위스 국경까지 무려 760km, 그중에서도 북부전선이 지나가던 플랑드르Flanders 지방에서 땅을 파고 엎드렸던 병사들은 ‘진흙’이라는 최악의 적을 만났다. 지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네덜란드에 인접한 플랑드르 지방이 지대가 낮은 곳이란 사실을 금세 눈치 챌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주둔한 병사들은 60~90cm만 땅을 파내려 가도 영락없이 스며 나오는 물 때문에 사실상 진흙 구덩이 속에 몸을 숨겨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례없이 많은 비가 내렸던 1914~1915년 겨울 시즌 동안 병사들은 적보다 진흙과 싸우는데 더 힘들어했다. 이듬해 겨울에도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한파와 해빙이 반복된 전선은 진흙천지가 되어 무너져 내린 참호 속에서 헤엄을 쳐야 했다.

 

더하여 혹독한 겨울에는 젖은 발이 얼어버려 병사들은 금세 참호족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젖은 발을 벗지 않고 군화 속에서 24시간만 지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호족은 동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여 신경이 점점 마비되면서 발이 붉어지거나 새파래지다가 심한 경우에는 살이 썩어 들어가 발을 절단해야 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참호족을 막는 방법은 젖은 발을 재빨리 말리고 마른 양말과 군화를 신는 것이지만 수시로 총탄이 날아드는 전선에서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다. 방수천, 허벅지에 이르는 고무 장화, 방수 각반, 집수공, 널빤지로 만든 길 등이 진흙에 대한 대비책으로 등장하였고, 고래 기름을 발에 바르고 젖은 군화에 밀기울이나 마른 신문지를 넣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비가 내리고 땅이 얼었다가 풀리는 동안 끝없이 만들어지는 진흙탕 앞에서는…. 그래서 병사들이 발견한 자구책은 한바탕 교전이 벌어지고 나면 재빨리 적이나 동료의 양말과 군화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참호 속에서 병사들을 괴롭히는 난제가 또 있다. 제법 규모가 되어 무너지지 않는 참호라 하더라도 비가 내리면 물이 빠지지 않아 오물, 동물들의 시체, 음식들이 둥둥 떠다니는 운하(?)로 돌변한다. 이런 비위생적인 곳이라도 지친 몸을 뉘일 수밖에 없는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번성하는 생명체가 있으니 바로 쥐였다. 쥐는 병사들의 식량을 갈취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옮겨주었다. 이에 물린 병사는 가려움과 동시에 병까지 앓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참호열이다.

 

정강이의 예리한 통증으로 시작하여 곧 몸이 펄펄 끓는 참호열, 비록 이것으로 죽지는 않지만 병에 걸리면 꼬박 한 달 반에서 석 달이나 걸리므로 전투력 상실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장군들의 골머리를 썩혔다. 하지만 이에게 물려 참호열뿐만 아니라 티푸스열(발진티푸스)에 걸린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티푸스열은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중대 질병이기 때문이다.

 

발진티푸스와 대단한 프로테우스 

 

 

 

발진티푸스는 인류사의 큰 격동기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갔다. 특히 1915~1922년 사이에 러시아가 지배했던 폴란드 동부에서는 3,000만 명이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300만 명이 죽는 비극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동유럽의 난민수용소, 포로수용소, 감옥 등 비좁고 더러운 곳에는 어디든지 발진티푸스가 창궐하여 수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전쟁 중에 군부대나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 환자가 발견되면 곧 엄청난 재앙이 생기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나치는 강한 전염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환자를 죽여 확산을 막으려는 극악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점령 중이던 폴란드 남동부의 로즈바도프 Rozwadow에서 티푸스열이 발병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마을에서 일하는 두 명의 폴란드 의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마을에서 바일-펠릭스 반응Weil-Felix reaction 양성인 환자들이 발견되어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1915년에 각각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균학자인 펠릭스Arthur Felix와 바일Edmund Weil이 발견한 이 검사법은 발진 티푸스 환자를 찾아내는 진단법이었다. 놀란 나치는 이 지역에 발진티푸스가 도는 것으로 단정하여 그 지역을 봉쇄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검사법의 맹점을 이용해 죽음의 위협에 빠진 이들을 구해내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든 사기극이란 것을  나치들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역의 개원의인 라조프스키Eugeniusz Lazowski와 마툴레비치Stanislav Matulewicz는 독일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일시 귀향한 친구가 수용소로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하소연하자 그를 구할 묘책을 궁리하게 되었다. 원래 이 검사는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환자의 혈청을 프로테우스균proteus과 반응시켜 응집 agglutination 반응이 일어나는 것으로 양성 진단을 내린다. 이것은 발진티푸스를 일으키는 리케차rickettia의 일부 종류가 일부 프로테우스균과 공통된 항원을 지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환자들을 아예 프로테우스균에 감염시켜 버리면 리케차 양성반응으로 나올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겼다.

 

우선 그 불쌍한 친구에게 죽은 프로테우스균을 주사한 다음 혈액을 뽑아 독일의 연구소로 보냈다. 1주 후에 ‘발진티푸스 양성’이라는 반가운 결과가 도착했다. 친구는 절대로 수용소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성공을 예감한 두 사람은 검사법의 위양성(僞陽性)을 이용해 기발한 사기극의 규모를 키워 유대인들도 구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만 발병하게 된다면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집중 학살할 것이 분명하므로 주변의 폴란드인들에게도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주 열심히 피를 뽑아 연구소에 보냈고 연구소는 죄다 발진티푸스 환자들로 진단하고 그때마다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 전보를 쳤다. 붉은 전보가 늘어나자 나치는 이 지역을 발진티푸스 창궐지역으로 판단, 인근의 12개 게토ghetto(유대인 거주지)까지 묶어 단 한 명의 지역민들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로 이 지역에서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운명이었던 8,000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치의 끄나풀이 의사들이 정상인과 환자의 샘플을 바꿔 조작했다고 밀고하는 바람에 나치의 군의관들이 현장 조사를 나왔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군의관들이 환자를 진찰하기는커녕 얼굴도 보지 않고서 혈액만 채취해 돌아갔다. 자신들도 티푸스에 걸릴까 두려워서였기 때문이다. 환자들은 모두 가짜였지만 혈액은 늘 양성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대담한 사기극은 들통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치의 군의관들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없다는 점이나 검체는 달라도 죄다 비슷한 수준의 항체 역가가 나온다는 점을 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티푸스로 진단된 환자를 한 명이라도 검진했다면 대담한 폴란드 의사들은 8,000명의 유대인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을 당했을 것이다. 임상보다는 검사결과를 중시하는 독일 의학의 전통 때문에 이런 거짓말 같은 드라마가 가능했을까?

 

전쟁이 끝나자 라조프스키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시카고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그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한참이나 지나 세상에 알려졌고 이란 이름의 책으로도 출판되어 폴란드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2006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제2의 쉰들러’로 기억하며 추모했다.

 

우리는 시골 의사들이 벌였던 대담한 사기사건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검사 결과지보다 환자 얼굴을 한 번 더 유심히 보아야 진짜 의사라는 사실. 둘째,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줄 다른 방법도 늘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 셋째, 아무리 시골의사로 일한다 해도 평생에 걸쳐 호기심을 잃지 말고 배우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적용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의사라는 직업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라는 사실. 마지막으로,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환자만을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료실 밖에서 고통받고 병든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도 공감과 연민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 만약 그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인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의사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점점 커지는 오늘날, 70년 전 그들이 보내준 기발한 발상과 대담한 용기에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