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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trivia는 ‘사소한 것들’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medical trivia는 사소해서 무시되지만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 다니겠습니다.”…박지욱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년, 2007년)

 

 

 


지금이야 외과의사들이 로봇을 이용해 수술을 하는 시대이지만, 항생제도 마취제도 소독약도 없었던 옛날에 이발사-외과의사들(barber-surgeons)의 주특기는 바로 방혈(放血: blood-letting)이다. 사혈(射血)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술은 먼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사용했다. 오늘날 의사들이 사용하는 치료법들 중 마취법이 160년, 수혈이 80년, 항생제가 65년의 역사를 가진데 비해, 방혈법의 역사는 무려 2,500년이나 되니 그 전통이 녹녹치 않다.1)


요하네스 케탐(Johannes de Ketham)의 12궁도 인간 Zodiac Man, Fasiculo de medicina(Venice, 1493)에서 해부학, 점성학, 체액론으로 이루어진 중세 의학의 이론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발사-외과의사들은 인체구조와 연결된 12궁을 참고로 방혈에 적합한 시기를 결정하였다. 예를 들어 생식기관은 전갈자리와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전갈자리에 해당하는 가을에 방혈하면 좋다고 해석한다.

방혈을 치료한(?) 질병들은 폐렴, 열병, 비장과 간의 질환, 류머티즘, 두통, 우울증, 고혈압, 뇌졸중, 노화로 인한 원인 미상의 질환… 한마디로 의사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병이라고 말해도 좋다. 꼭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정기적으로 방혈을 해주면 건강에 좋다는 믿음마저 팽배했던 까닭에  의사들이 권장하고 환자들이 원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치료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던 치료법이었다. 잠시 방혈 현장을 한번 구경 가보자.


먼저 시술을 받을 환자는 팔뚝을 내밀고 지팡이를 움켜쥔다. 그러면 팔에 푸른 정맥들이 잘 드러난다. 시술을 할 상부지점에 지혈대(노란 고무줄)를 맨다. 이렇게 하면 팔다리의 끝에서 몸의 중심인 심장으로 흘러들어 가는 정맥의 흐름을 막을 수 있다.
적절한 정맥 혈관을 찾아 방혈침(針)으로 찔러 붉은 피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다. 이때 대략 1파인트의 혈액을 뽑아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한 파인트가 어느 정도의 부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4)

 

환자의 혈관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내기 위해서는 하얀 린넨 붕대가 많이 필요했다. 사용한 붕대들은 잘 씻어서 빨래걸이에 널어 말리는데, 바람이 휘리릭하고 불면 붉은(이미 갈색으로 변했을) 피가 묻은 하얀 린넨 붕대들이 어지럽게 빙빙 돌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발관 앞에서 무심히 쳐다보며 지나치는 삼색 표시등의 회전은 바로 이 모습을 재연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삼색등 꼭대기에 있는 돔 모양의 뚜껑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것은 방혈 목적으로 사용하는 거머리 leech를 담아두는 통(leech basin)을 상징한다.5) 사람 손이 닿기 어려워 직접 찌르기 어려운 곳에는 방혈침 대신에 거머리를6) 놓아 피를 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궁 입구, 잇몸, 입술, 코, 손가락 등지이다. 지금도 손가락 접합 수술 후에는 한 마리에 50,000원이나 하는 의료용 수입 거머리를 붙여두는 치료법이 남아있다면 믿기 어려울까? 

 

방혈할 때 혈관을 찌르는 날카로운 방혈침은 란셋(lancet)이라 불렀다. 영어 단어 lance는 창(槍)을 뜻하며, lancer는 창기병(槍騎兵), free lancer는 일정한 소속 없이 자유로이 이런저런 일을 찔러보는 프리 랜서, lancet은 ‘작은 창’을 뜻한다. 지금은 헌혈이나 혈당 검사를 위해 자동식 란셋을 이용해 거의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찔러대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동식 란셋밖에 없었다. 수동식 란셋이야말로 찌른다는 의미의 란셋에 더 잘 어울린다.

 

1823년에 영국에서 창간된 의학저널의 이름은 이었다. 물론 그 이름은 바로 방혈에서 사용하던 뾰족 침, 란셋에서 따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것은 방혈의 전통을 존중했던 영국 의사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저널을 창간한 웨이클리(Thomas Wakley)의 설명을 통해 어디 그 연유를 한번 들어보자.7)

 


 

“란셋은 빛을 향해 열어주는 아치형의 창문이 될 수도, 불순물을 솎아내는 날카로운 수술기구도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잡지가 그 두 가지 모두의 의미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란셋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들은 란셋을 모두 포기하였다. 1828년에 프랑스 의사 루이(Pierre-Charles-Alexandre Louis)가 의학에 통계학 개념을 도입하여 질병의 보편적 자연사(natural history)를 확인해보자 방혈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로 효험이 없는 치료법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연이어 1830년대 초 영국의 도시들을 뒤덮은 발진티푸스의 대유행기에 환자들에게 방혈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들의 기운을 빠지게 만들자 의사들은 방혈치료법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효험도 없는 방혈이 무려 2,500년 동안 의학계에서 중요한 치료 기술로 손꼽아졌던 숨은 이유는 도대체 뭘까? 아무리 날뛰는 환자라고 해도 일단 피를 뽑고 나면 잠잠해졌고, 또 환자 자신이 뭔가 ‘어찔한’ 느낌을 겪고 나면 병이 나은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질병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그리고, 환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잘 차려진 병원의 외래와 검사실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현대적인 란셋, 수술받은 환자의 손에 붙어 있는 거머리, 그리고 네거리의 한 켠에서 천천히 돌아가는 이발소 표시등은 외과의사와 이발사, 그리고 방혈에 대한 오래된 역사를 나지막이 속삭여주고 있다.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겐 ‘쇠귀에 경읽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1. 방혈 시술 2,500년을 12시간으로 보면 수혈은 11시 57분 40초부터, 항생제는 58분 20초부터 사용되었다. 
2. www.nlm.nih.gov/.../horse/ast_ketham_p06.html
3. www.uib.no/isf/ people/aarelate.htm
4. 1파인트는 0.57리터이다.
5. www.twingroves.district96.k12.il.us
6. leech는 앵글로색슨의 단어 중 ‘치료하다’는 의미의 loece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중세의 의사들은 스스로를 ‘거머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7. [피의 역사] 더글러스 스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