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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비소(砒素;arsenical) 이야기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2006, 2007)

 

 

 

- 그런데, 부국장님, 도대체 해롤드 메들리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는 어떤 종류의 비소를 찾길 기대하고 계십니까?

   머서는 입술을 오므렸다.

- 박사님께 말씀드려도 지장은 없을 테니 말씀드리지만, 해롤드 메들리는 살바르산이나 네오살바르산 가운데 하나를 손쉽게 확보해 둘 수 있었겠지요. 둘 다 중요한 약품으로 사용되니까요.

- 물론 그렇습니다. 0.1그램을 사용하면 아주 유용한 약이지만, 그 이상을 사용하면 위험하지요.

 

… 중략 …

- … 에메랄드빛 하늘 말입니다, 부국장님. 그 밝고 풍부한 에메랄드빛의 녹색…… 그건 물감 중에 구리 아비산염copper arsenite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빛깔입니다. …… 그림을 가져다가 하늘 부분을 약간 떼어내서 분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조사해보면 시금치를 준비하게 한 것이 부인이었고, 또 식사를 남편에게 들고 간 것도 부인이라는 것이 밝혀질 겁니다. 시금치는 녹색이고 또 맛이 약간 씁니다. 구리 아비산염도 그렇지요.

- 에릭 앰블러 Eric Ambler(1909~1998), <에메랄드빛 하늘 The Case of Emerald Sky>, 1940년 중에서.

 

 

) <마니아를 위한 세계미스터리 걸작선>, 도솔출판사, 2004

) 1967년 콜롬비아에서 채굴한 세상에서 가장 큰 에메랄드 광석, 858캐럿, 무게 172그램,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안 자연사 박물관 소장.

 

 

인용된 이 이야기는 어떤 부유한 노인의 변사 사건으로 시작한다. 부검을 통해 다량의 비소가 조직에서 검출되자 경찰은 제일 먼저 의과대학생인 아들이 유산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한다. 비소로 만드는 매독치료제 살바르산은 아들이 병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야의 탐정이 아들보다는 재혼한 아내를 더 의심해보라고 귀띔한다. 그녀가 즐겨 그리는 에메랄드빛 하늘은 비소 화합물로 만든 물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매독치료제와 물감의 대결, 누가 이겼을까?

그렇다면 물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나폴레옹은 물감에 당한 것 같다.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암으로 죽었다고 알려진 나폴레옹은 머리칼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이를 근거로 그가 독살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가 살았던 집에는 벽지 혹은 카펫이 녹색이었다고 한다. 이 녹색의 원료는 아비산수소구리(CuHAsO3). 녹색 물감은 보통의 경우에는 유해하지는 않지만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공기 중으로 스며 나와 거주자를 서서히 독살시킬 가능성이 있는데 세인트 헬레나 섬이 바로 그런 기후였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독기를 내뿜는 집’에서 살았던 셈이다. 2010 7월 베네수엘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 Simon Bolivar(1783~1830)가 사후 180년 만에 관 뚜껑이 열려 유골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역시 그가 비소 중독, 즉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벌어진 일이다.

동양에서도 청나라 말기, 병법자강 운동으로 개혁을 꿈꾸었던 황제 광서제(光緖帝)도 독살당한 것으로 의심받는데, 100년 만에 발굴된 그의 유해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소가 살인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비소는 조금씩 사용하게 되면 희생자가 금세 죽는 것이 아니라 몸이 조금씩 망가져서 서서히 죽게 되는데 이것이 급사하는 독살(毒殺)보다는 서서히 죽어가는 병사(病死)에 더 가까워 보이기에 살인을 숨기기에 좋아 보인다.

하지만 광서제가 독살당하던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비소를 이용하여 아주 쓸모 있는 약을 만드는데 바로 살바르산 비소Salvarsan arsenical였다. 독일의 면역학자 에를리히Paul Erlich(1854~1915)는 일본 출신의 세균학자 하타Sahachiro Hata 秦佐八郎(1873~1938)와 함께 1909년에 ‘세상을 구원하는 비소’라는 뜻을 지닌 살바르산을 개발하였다. 살바르산은 ‘606호’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7년 동안 605회의 실패 끝에 합성해낸 물질로 인간이 만든 최초의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다.  

 

 

 

에를리히와 하타

 

학생 때부터 환자 보는 일보다는 조직을 염색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에를리히는 자신의 별취미 덕택에 비소를 알게된 것이다. 아마도 에를리히가 염색에 성공했던 조직은 무슨 색으로 물들었을까? 녹색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비소는 중요한 독약으로 사용되었었다. 사극(史劇)에 보면 국사범(國事犯)들이 어명을 받들어 비상(砒霜)으로 만든 사약을 한 사발먹고 죽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비상이 바로 비소의 화합물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사형은 교수형(絞首刑)이나 참수형(斬首刑)이었지만 지체가 높은 사대부들은 국왕이 특별히 하사한 사약(賜藥)을 먹고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조용히 죽을 수 있는 은전이 베풀어졌다.

 

 

양반에게 사약을 내리는 장면

 

하지만 비상(비소)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 번에 바로 죽는 약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사약을 마신 죄인은 독 기운이 빨리 퍼지도록 뜨거운 방에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시간은 한참 걸리니 그 고통은 어떠했을까? 우암 송시열은 빨리 죽지 않아 무려 세 사발의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하여간 이런 ‘미지근한 독약’을 하사하는 국왕의 정치적 저의는 무엇이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비상은 독약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비상이 학질(말라리아)의 치료제, 구충제로 사용되었으며 피부병이나 악성 종창의 치료제로도 사용되었던 약물로도 등장한다.

하여간 살바르산은 유독한 ‘수은’을 대신하여 매독의 특효약으로 각광을 받게 되어 뭇 성인(性人)들을 구원해주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오살바르산(1912)은 네오살바르산과 아세타졸과 더불어 개량된 비소제들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40년에도 이 약들은 매독치료제로 아주 유용한 약물이었지만 몇 년 후 페니실린이 등장하자 재빨리 의사들의 처방전에서 사라졌고 곧 잊혀졌다.

 

2000년에 FDA가 백혈병 치료제 Trisenox (arsenic trioxide)를 승인하고 그 성분이 비소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마탄(魔彈) 606호’를 떠올렸다.

앰블러의 추리 소설은 이렇듯 당대의 중요한 약물이었던 살바르산을 등장시켜 독자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비소를 약으로 사용하는 의사와 물감으로 사용하는 화가, 누가 가엾은 노인을 서서히 말려 죽였을까? 비소의 숨겨진 이야기를 안다면 감추어진 살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