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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의 medical trivia

박 지 욱
제주시 박지욱신경과의원
신경과 전문의
<
메디컬 오디세이> 저자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2006, 2007)

 

 

 

 

 

야파의 나폴레옹 

 

 

 

『야파의 페스트수용소를 시찰하는 나폴레옹

 [앙투왕 장 그로. Napoleon in the Pesthouse at Jaffa. 1804. 루브르 박물관 소장]』

 

 

프랑스의 화가로 나폴레옹의 종군화가였던 앙투왕 장 그로[Antonie-Jean Gros (1771~1835)]가 그린 이 그림(우측 상단) 1799 3 7일에 야파의 페스트 수용소를 시찰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야파(Jaff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도시로 지금은 텔 아비브(Tel Aviv)에 속해 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나폴레옹이 왜 나타난 걸까?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나폴레옹의 1798년 이집트와 시리아 침공

 

 

1798 5, 혁명정부의 총사령관이었던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공 길에 올랐다. 프랑스의 눈엣가시인 영국이 식민지 인도로 가는 육로인 이집트를 프랑스가 점령하여 영국에 타격을 주는 것이 우선 목표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이어 진정한 정복자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해 뜨는 지방, 즉 옛 오리엔트 지방인 동방 세계를 정벌할 야심도 있었다. 그래서 침공 군대의 이름도 ‘동방원정군(Armee d Orient)’이었다.

나폴레옹은 동방원정군의 의료를 책임질 두 명의 의사를 뽑았다. 라인 강 주둔부대에서 일했던 서른 셋의 장 라레[Dominique Jean Larrey (1766~1842)]를 수석 외과의사(surgeon-in-chief), 이탈리아 주둔군의 의사였던 서른 여섯의 데쥬네트[Rene Nicolas Desgenettes (1762~1837)]를 수석의사(chief doctor)로 임명했다. 라레와 데쥬네트는 5만 명의 장병들을 진료할 200여 명의 엘리트 의사들을 선발하였다.

원정 2개월이 못 되어 카이로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군사정권을 수립하고 이집트인들에게 유화정책을 펴서 현지인들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이 땅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은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해군을 보내 프랑스군의 해상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더하여 카이로에서는 프랑스에 반대하는 폭동이 발생하여 프랑스 군인들 수백 명이 살해되었다(이집트인들은 10배 더 많이 죽었다). 안팎으로 위기에 빠진 나폴레옹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799 2월에 북진하여 시리아 침공 길에 올랐다. 이제 영국군의 지원을 받는 오스만 제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야파의 나폴레옹

 

 

『이집트의 나폴레옹 [쟝-레옹 제롬 (Jean-Leon Gerome)]』

 

 

3 7일 프랑스군은 그림 속에 나오는 고대도시 야파를 공격했다. 오스만 군대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던 까닭에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민간인들까지 학살하는 무자비한 보복을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군대, 페스트(pest, plaque)가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페스트군, 아니 페스트균( ! )의 공격을 받자 침공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군대의 의료책임자인 데쥬네트와 라레는 ‘서혜부 임파선종 고열’이라는 병명을 붙여 페스트가 아닌 것처럼 위장해 보았지만 페스트균의 공세는 꺾이지 않았다. 데쥬네트는 ‘군인들의 용맹심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페스트 환자의 고름을 자신의 몸에 투입하는 고육지책을 내놓았지만 허사였다.

 

 

『페스트균을 투입하는 데쥬네트 [1799]』

 

 

데쥬네트가 이렇게 페스트 해결책에 골몰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페스트병원을 방문했다. 적의 정면을 돌파하는 나폴레옹의 전술처럼 그는 ‘페스트균의 본거지’를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용감하게도(!) 환자에게 말을 건네면서 그의 몸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나폴레옹의 뒤를 따르는 부관들이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멀리 원경으로는 나폴레옹군이 처참하게 짓밟은 야파의 성곽들이 폐허가 된 채 불타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군은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고 야파를 지나 북쪽 하이파(Haifa)를 거쳐 아크리(Acre)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페스트, 장티푸스, 이질 연합균(!)의 공격을 받아 전력의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더 이상 침공을 지탱해 갈 힘이 없음을 깨달은 나폴레옹은 시리아 침공을 끝내기로 결심하고 5 17일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하면서 남겨진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적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야파에 수용되어 있는 페스트 환자들도 포함되었다.

 

 

데쥬네트

 

 

『데쥬네트의 초상화 [Antoine-Fran  ois Callet]』

 

 

나폴레옹은 데쥬네트에게 야파에 남은 페스트 환자들을 치사량의 아편으로 안락사 시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데쥬네트는 “나의 임무는 환자들을 지키는 것”이라며 나폴레옹에게 항의했다. 나폴레옹은 화가 났지만 그를 설득하지도, 명령을 취소하지도 않았다. 대신 수석약사인 장 프랑소아 루아예[Jean-Fr-     a nois Royer]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이번에는 명령이 순조롭게 집행되었다. 그림 속에 등장했던 환자들은 모두 이때 죽었을 것이다.

 

카이로로 철군한 나폴레옹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데쥬네트가 괘심했던지 7월에 “페스트연구위원회” 창설을 요구했다. 위원회를 통해 시리아 침공 때 페스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쥬네트를 문책하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의중을 읽었던 데쥬네트는 위원회에 불참을 선언했다. 자신이 패전의 희생양이 되길 거부한 것이다. 대신 나폴레옹이 야파의 페스트병원 환자들에게 비인간적인 명령을 내려 범죄행위를 부추겼다고 공격했다. 이번에는 나폴레옹이 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데쥬네트는 장병들에게 존경 받는 의사였고, 나폴레옹 역시 그를 필요로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8월 말에 고국과 고립된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데쥬네트는 한동안 이집트에 남아 있었다. 이집트에 남겨진 주둔군은 1801년 영국군에게 패했고, 프랑스는 이집트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라레

 

 

라레의 초상화 [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1804. 루브르 박물관]』

 

 

라레는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의 기초를 쌓은 인물로 평가된다. 부상병들을 치료 우선순위에 따라 분류했고, 전장에 처음으로 앰뷸런스(ambulance)를 도입했다. 동방침공 때도 현지 상황에 맞는 임기응변식 앰뷸런스를 고안했는데, 바로 아랍인들이 애용하는 낙타 등짐을 이용한 앰뷸런스였다. 

 

 

『라레의 앰뷸런스 [ambulance volantes]』

 

 

이집트-시리아 침공 때 라레가 고안한 낙타 앰뷸런스

 

 

라레는 나폴레옹을 따라 독일, 폴란드 그리고 모스크바 침공에도 참여했고, 나중에는 황제의 주치의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패배했던 워털루 전투(1825)에서 총상을 입고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처형될 운명이었지만 이전에 그가 치료했던 환자의 아버지(프로이센군의 육군 원수)의 도움을 얻어 수용소에서 탈출하였다.

평생에 걸쳐 25개의 작전과 300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군진의학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최초로 ‘고관절 절단수술’을 시도한 인물들 중 한 명이다(1812). 지금도 그의 이름은 견관절 절단, 지중해 황열, 서혜인대 아래의 대퇴동맥 결찰에 남아 있다.  

 

 

야파의 페스트 수용소를 시찰한 나폴레옹

 

페스트는 쥐벼룩이 사람을 물어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라는 세균이 인체에 들어와 일으키는 감염병이다. 페스트에 걸리면 몇 시간 안에 임파선, 특히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임파선에 종기가 생겨 점점 커지다가 곪아 터진다. 이것 때문에 환자가 너무 아파 거의 죽을 지경이 되거나 미쳐 날뛸 정도다. 더불어 구토와 고열이 나며 이내 피부에 발진과 피하 출혈로 검은 반점(이 때문에 “흑사병(黑死病)”이라 불렸다)이 나타나고 1주일 이내에 사망한다(腺페스트(bubonic pest)). 일단 페스트에 걸리면 낫는 경우가 없기에 일단 임파선만 부어올라도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 폐에 번지면 피와 거품이 섞인 가래를 동반한 기침이 나오는데 2~3일 이내에 사망한다(肺페스트(pulmonary pest)).

페스트는 가족 중 한 명만 아파도 옷이나 소지품을 통해 모든 가족에게 번지니, 영내에서 한 명이라도 환자가 생기면 집단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이제 그림 속(맨위 상단)으로 들어가 보자.

야파의 모스크 내부가 무대인 이 그림은 두드러져 보이는 3개의 아케이드로 3등분되고 있다. 멀리 배경은 시간적, 공간적 설명을 한다. 왼쪽부터 야파의 성벽, 휘날리는 프랑스 국기,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감도는 포연이 보인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나폴레옹을 수행하며 그의 팔을 부여 잡은 부관(붉은 화살표)은 데쥬네트와 많이 닮았다.

 

 

시선을 앞으로 그리고 제일 왼쪽으로 돌리면 터번을 쓴 투르크인이 보인다. 그는 환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선을 베푸는 부자인 것 같다. 그의 뒤편으로는 들것에 뭔가를 실어 가는 흑인이 보이는데 아마 시신일 것이다.

화면의 가운데는 부관들을 대동한 나폴레옹이 보인다. 한 부관은 코를 막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아랑곳 않고 환자의 겨드랑이를 만지고 있다. 겨드랑이는 페스트로 인한 종기가 생기는 곳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왼팔을 그 뒤에 선 부관이 잡고 있다. 마치 만지지 말라고 극구 말리는 모습 같다.  얼굴로 봐서는 데쥬네트인 것도 같다. 하여간 군 지도부는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던 참이었으니 어쩔 수도 없었겠다.

하지만 다른 환자는 이미 장군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있다. 옷에 쥐벼룩이 있다면 천하의 나폴레옹도 페스트균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오른쪽에는 겨드랑이의 종창을 절개하는 투르크인 의사가 보인다. 투르크 의사 뒤편으로 문에 붕대를 감고 그늘에 선 프랑스 군인이 보인다. 이집트 침공 때는 페스트 외에도 눈병이 심하게 돌아 많은 병사들이 실명을 했다. 당시에는 “군대 눈병(ophthlmia militaris)”이라 불렀다.

                    

그로가 이 감동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동방 침공 후 15년이나 지난 1804년으로 나폴레옹이 그림의 주문자였다.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을 앞둔 가을부터 파리에서 전시되었다.

새 황제는 이전의 부르봉 왕가들의 부패하고 무능한 왕과는 달리 국민을 보살피는 자애로운 통치자라는 선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가 ‘오랜 시간 전쟁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웠고,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무서운 페스트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군인이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프랑스 왕들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전통 중 하나인 ‘왕의 안수(Kings touch)’를 연상하게 한다. 환자들이 왕의 고결하고 자비로운 안수를 받으면 씻은 듯 병에 낫는다는 ‘왕의 안수’, 영국과 프랑스를 가리지 않고 많은 왕들이 백성들에게 그런 무의미한 자비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이미 황제의 자격을 지녔다. 『야파의 나폴레옹』은 대관식을 앞둔 황제 나폴레옹 1세를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림이다. 그리고 당시에 횡행하던 페스트를 동방세계의 의사들은 어떻게 치료하는지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고.

 

 

 

[출처]디아트리트 VOL.13, NO.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