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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최우선이다

손현아 한국병원약사회 사무국장

가루약 조제수가 30% 인상해 주면 없던 약이 생겨나고 고장난 기계가 고쳐집니까? 다른 무엇보다 환자들을 먼저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213일 서울시 환자권리옴부즈만이 서울시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 가루약 조제 현황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을 주제로 개최한 환자권리포럼에서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안상호 대표가 울부짖듯 내뱉은 말이다. 선천성심장병 아이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서울 몇 군데 대형병원밖에 없는데, 일부 상급종합병원 문전약국에서 약이 없다, 기계가 고장났다 등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가루약 조제를 거부하여 지난 2012년부터 문제 제기를 했는데 6년이 흐른 지금에도 크게 나아진 게 없는 현실에 안상호 대표는 끝내 울화통을 터뜨렸다. 비록 일부 약국의 문제라 해도, 나 역시 약사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올해 나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며 아프게 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지난 27일 국회 김상희 의원실에서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집단사망사건,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자 모두를 숙연하게 했던 유가족 대표 중 한사람이다. 신생아 집단사망은 몇몇 의사, 간호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인력 부족, 저수가, 의료시스템상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는 의견은 일견 맞는 말이지만,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아이를 어이없는 사고로 잃은 부모의 눈물 앞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궁색한 변명으로만 들렸다.

 

신생아중환자 집단사망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깊은 슬픔을 안겨주는 동시에 보건의료계가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숙제를 던져주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관련감염 종합 대책 TF’를 만들어서 감염예방 및 관리를 위한 종합 대책을 발표하였고, 그 중 하나로 신생아 및 소아 중환자 주사제 무균조제료 가산이 결정되었다.

 

주사제 무균조제는 일찌감치 선진국에서 의료기관 내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약제부에서 무균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숙련된 약사가 업무를 담당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대학병원을 시작으로 도입하였다. 한국병원약사회는 1988년부터 주사조제 특수연구회를 만들어서 이론 및 실무 교육을 통하여 전문가를 양성하고 전국적으로 주사제 무균조제 업무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무균조제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정기적으로 무균환경 및 시설을 관리하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를 교육, 양성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데, 주사제 무균조제 수가가 인정된 것은 몇 년 되지 않고 2009년도 약제업무 수가 연구에 의하면 당시 수가는 원가의 15% 수준에 불과하였다. 2017년에 1개 대학병원에서도 연간 4억원 정도의 적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는 감염 최소화와 환자안전을 위하여 계속 업무를 수행하면서 정부에 지속적으로 수가 개선을 건의해 왔다


또한 지난 11월에 한국병원약사회에서 식약처 및 질병관리본부의 자료, 미국 및 일본 등 외국 자료 및 사례를 참고하여 국내 실정에 맞는 한국판 <주사제 무균조제 가이드라인>을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에서 각 병원의 주사제 시설이나 장비 표준화, 보상 체계등에 대해서도 본격 검토를 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 2010년 정맥으로 투여해야 할 항암제 빈크리스틴을 척수강으로 투여한 간호사의 실수로 아홉 살 종현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20167월 환자안전법이 개정되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 환자안전서비스포탈에 2016년부터 201712월까지 보고된 4,427건의 환자안전사고 중 약물오류1,282건으로 29%를 차지하여 낙상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다. 그에 따라 올해 10월 중순부터 시작된 급성기병원 3주기 의료기관인증에서는 의약품관리체계가 대폭 강화되었다.

 

한국병원약사회에서는 환자안전법 제정 전부터 환자치료과정에서 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환자안전전담인력에 약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고, 약사는 빠진 채로 법이 제정되었다. 신생아집단사망사건 이후에야 환자안전전담인력에 약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환자안전법 개정안이 지난 12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는 통과하였으나 6일 본회의에서는 환자안전사고 의무보고 신설 조항에 대한 문제제기로 환자안전법 개정이 미루어졌다. 최대한 빨리 환자안전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약사가 당당하게 환자안전전담인력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지난 2016년 전세계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며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경기가 치러진 이후 인공지능은 우리 사회의 산업, 경제, 보건의료, 문화와 생활까지 폭넓게 활용되면서 흔하게 듣고 쓰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이 낳은 4차 산업혁명은 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하여,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로봇공학, 무인운송 수단, 3D 프린팅, 나노기술 등은 점점 더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향후 10년은 지난 50년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보건의료계에서도 지난 해부터 4차 산업혁명시대의 OOO’라는 제목으로 각종 학술 행사 등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한국병원약사회에서도 지난 201711‘4차 산업혁명과 병원약사의 역할로 주제로, 올해 11월에는 환자안전을 위한 약사의 역할을 주제로 각각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이 되면 사라질 직업군에 약사가 상위 랭킹되면서 약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불안감과 우려 속에서 다양한 진단과 해법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는 아무리 인공지능과 로봇이 발달해도 약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로봇 조제 시스템이 도입되어도 약사들이 환자와 소통하고 팀 의료의 일원으로 환자에게 가장 최적의 약물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약사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계속 근무를 하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서 최초로 주사제 무균조제 로봇을 도입한 삼성서울병원에서도 조제의 정확도를 높이고 조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로봇을 사용하고 있지만, 약사의 처방전 검토나 처방중재 등 역할은 그대로 수행하고, 남는 시간은 투여 후 부작용모니터링 및 환자 상담과 교육 등 치료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는 업무에 더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병원에서 자동정제포장기 등 조제자동화가 이루어졌지만, 약사의 업무와 역할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제도에 따른 규정과 지침을 마련하고 안전하고 체계적인 약물관리를 하면서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의 의한 마약류 취급보고도 해야 하고, 입원환자 조제·복약지도, 의약분업 예외에 해당되는 외래환자 조제·복약지도, 주사제 무균조제, 약물이상반응 모니터링, 집중영양치료팀, 감염관리팀 등 각종 팀 의료와 종양약료, 중환자약료 등 임상약제업무, 약대 학생 실무실습교육까지 많은 업무와 역할을 해 내야 한다. 하루 24시간 1365일 운영해야 하는 병원약제부서 특성상 한 달에 최소 1회 이상 주말 당직, 명절연휴 등에도 하루 이상 출근, 야간 당직 등 오히려 주 40시간 근무제에 빨간 날은 다 쉬는 일반 직장인들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고 업무가 과중하다 보니 이직률도 높은 편이다


의사, 약사, 간호사 모두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전문인으로서 대부분 부족한 인력과 미흡한 보상체계 등 열악한 환경에서 과중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다. 의료사고나 약화사고라도 나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고, 최근에는 응급실에서 만취환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등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한다. 우리 사회와 환자들이 보건의료인들에게 너무나 엄격하고 높은 수준이 전문성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답답고 억울한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실수와 달리 보건의료인의 실수는 자칫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일시에 앗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면허를 가지고 일을 하는 동안에는 환자안전을 가장 중심에 두고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실수를 하지 않고 오류를 없애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면허’, 그 무거운 무게가 감당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최우선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