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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광사 유광사여성병원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 ‘법 없이도 살 사람’임을 자처하지만, 나 역시 경찰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하지는 않다.
 
특히나 산부인과 의사로서 경찰을 만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그러나 때로는 수사에 도움이 되는 자문을 해줄 수도 있는데, 결정적인 제보를 제공해 범인을 잡을 수만 있다면 의사로서도 보람된 일이리라.
 
문득 몇 해 전 강간범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때가 떠오른다. 어느 날인가 새벽녘에 형사 두 명과 20대 후반의 한 여성이 병원을 찾아왔다.
 
사연을 들어보니, 20대 후반의 그 아가씨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밤 늦게 귀가하다 집 근처에서 동네 불량배로 보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육체적 상처도 상처거니와 정신적 충격이 컸을 텐데 그 아가씨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범인을 잡는데 적극적이라고 한 형사가 전했다.
 
형사들을 대기실에 앉혀놓고 진찰실에서 검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검진 중간에 그녀에게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용기를 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의사이기에 앞서 한 남자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당시 진료실을 나서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살벌해지는 사회를 개탄하며 자식 가진 한 부모로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질 분비물에서 정충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한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검진결과를 형사들에게 말해주니 그들 역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가 어두워서 피의자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당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정충마저 나오지 않다니……
 
그때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가씨는 진찰상으로 불 때 강간당한 것은 확실하고, 범인이 혹시 정관수술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같은 추측을 형사들에게 말해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바쁜 병원일로 이 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을 무렵 다시 형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원장님 덕분에 범인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하고 고마움을 표했다.
 
범인이 정관수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기초로 해 주변 불량배를 수사한 결과 생각보다 쉽게 범인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순간 아픈 기억 속에서도 범인을 잡게 돼 안도의 숨을 돌릴 그 아가씨의 얼굴이 떠올랐고, 나 역시 병원을 찾은 환자를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다소 풀렸다.
 
혹시라도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몸과 마음에 씻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서둘러 기분을 새롭게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어려운 문제이고 개인적인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용기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참고 숨기는 행동은 자신에게 굴욕적이며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성폭력이라는 독버섯이 운신할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점에서 비록 자신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과감히 경찰에 신고한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그녀가 지난날 한 순간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을 해 나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