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1 (화)

  • 구름많음동두천 20.9℃
  • 구름조금강릉 22.7℃
  • 흐림서울 21.7℃
  • 맑음대전 24.6℃
  • 맑음대구 25.7℃
  • 구름조금울산 23.8℃
  • 맑음광주 23.4℃
  • 구름조금부산 25.1℃
  • 맑음고창 23.7℃
  • 구름많음제주 23.0℃
  • 구름많음강화 21.1℃
  • 구름조금보은 22.0℃
  • 맑음금산 23.5℃
  • 구름조금강진군 24.4℃
  • 구름조금경주시 25.0℃
  • 구름조금거제 24.9℃
기상청 제공

요가의 의학적 이해

임용균


이 책으로 인해 번거로움을 감내해야 함에 드리는 사죄

어줍잖은 언어로 나불대야만 표현되고 인식되는 이 문명세계에게, 일상의 뉴스미디어만으로도 이미 다섯 트럭분 이상의 책에 묻혀 사는 현대인에게, 그리고 이 안 해도 되는 작업을 감행하느라 몸의 감쇠현상을 부추기는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동양사상의 원류로 간주되는 요가를 각기 다른 문명세계에서 태동한 문화의 해석틀로 일치하는 인식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는 점과 더불어 인류보편사적 패러다임이라 단정지을 수 없는 과학 그리고 또 그 과학의 한 갈래인 의학을 수단으로 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를 참으로 어리석다 생각해도 차마 외면치 못하고 읽어야 하는 독자들에게 못내 안타까운 하소연을 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 동양사상을, 오감(五感)을 통한 분석적 사고를 요구하는 과학으로 해석해보려는 의도가 처음부터 모순되는 일일지 모르나 분별(analyzing differentiation) 자체가 통합(integration for the oneness)으로 가는 순환고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에서다.

둘째로, 요가의 의학적 해석을 원어인 범어(Sanskrit)를 통한 이해로 풀지 못하고 중국어(대중적 우위성을 지닌 漢字語)와 영어(現代醫學用語의 일반적 통용어)의 조합으로 구성함에 피할 수 없는 의미의 간극을 인내해야 하는 독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가를 의학적으로 해석하려면 요가가 태어난 인도의 언어로 풀어 써야 제 맛이 날 것이나 중국 문화권의 영향하에서 전승된 동양사상과, 현대의학을 대변하는 영어문화권 에서의 과학사상을 접목시키는 작업이므로 결국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괴리감 내지는 인식과 표현의 한계는 읽는 이의 통찰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에서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고매한 사상이라도 세월이 흘러서든 장소가 바뀌어서든 변형된 형태로의 현재태(現在態)를 현재의 다수가 수정하여 이해하려면 현재 해당지역에서의 해석틀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독자들을 유인하는 또 하나의 작위를 범하는 구실을 붙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위(作爲)가 무위(無爲)사상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의 최고경지에 이르기 위한 훈련 이라는 해석이 옳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한국이라는 시공(時空)에 요가를 보는 관점의 여러 가지 갈래 중의 하나로 노자의 무위(無爲, 道德經 第63章)목적적인 관점이 되거나, 맹자의 사단(四端)과 관련하여 인식세계의 확이충지(擴而充之, 孟子 公孫丑篇)적인 불완전한 궤적이 되거나, 헤겔의 변증법적 정반합(正反合) 과정 중의 편린을 남긴다는 면에서는 죄책감까지는 면할 수 있으나 다만 이 글이 필요치 않을 만큼 높은 경지에 있거나 요가와 의학 이외의 이유에서 마지못해 이 글을 읽어야 하는 경우라면 이 글이 불필요한 작위가 될 수 있음에서다.

응축된 씨앗이 원래 품었던 유전자적 소인을 온전하게 발현하려면 좋은 종자임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 씨앗에 맞는 토양이 더 중요할 수 있지만, 싹틀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이 종자와 토양을 따지는 것이 도치(倒置)됐더라도 서로에게 영향이 없을 수 없으므로 종자가 토양을 요구하는 모양새가 마치 서로 기다렸다는 듯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움트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이 일순간일 수는 없으니 웬 만큼의 인내력을 담보로 하고, 지켜보기에 빤하고 쉬운 과정이라 내동댕이쳐버릴 종자보다 지켜보기가 지루하고 어려워도 움트고 자라는 과정이 신통하여 한 눈 팔다가도 다시 또 찾아볼 수 있는 종자를 택했음을 하세월에!라는 불만 없이 정진(精進)되길 바랄 뿐이다.

어쩌면 이 저술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거슬러 오르려는 터무니없는 작업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양방향을 지향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확신과 함께 역행 때문에 순행이 돋보인다는 인식의 단초를 제공하고 싶고 하다못해 오르지 못하고 그 물살에 가냘프게 휩쓸린다 하더라도 포말로 솟구쳐 산화(散華)라도 될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릴 수 없다. 단언컨대 동양학은 대중의 학문이 될 수 없다. 동양의 학문이 서양의 학문에 의해 점령을 당한 이유는 동양학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쉽고 짧은 기간에 단맛을 볼 수 있는 서양학으로 대부분이 몰려간 때문이다. 동양학은 처음부터 높거나 깊게 시작하기 때문에 고수와 하수 간에 차이가 분명하다. 즉 그 관계가 수직적이다. 서양학은 얕게 시작하여 넓게 보기 때문에 끌어안을 수 있는 폭이 크다. 즉 그 관계는 수평적이다. 민주적 수평의 씨줄(緯線)이 그물로서 가닥가닥 제 역할을 하려면 비민주적 수직의 날줄(經線)이 제대로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한다. 경(經)을 마지막 자(字)로 하는 책(冊)이 중요한 이유이다.

요가라는 사상의 인식세계에서 수렴(centripetal convergence)과 확산(centrifugal divergence)을 반복하여 궁극에는 수렴인지 확산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짠한 한마당을 마련코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란 것이 슬프게는 하지만.

丁亥年 孟春之節 碧泉 林容均 조아리다.

저 자 : 임용균
출판사 : 군자출판사
정 가 : 13,000원
페이지 : 174
발행일 : 2007-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