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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의료소송의 입증책임

김연희 변호사(의성법률사무소)


의료사고가 발생할 경우 의사에게 무과실의 입증 책임을 지우는 즉, 입증책임을 전환시키는 ‘의료사고피해구제에관한법률’이 지난 8월 2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법학을 전혀 접하지 않은 의사들에게 입증책임이라는 말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주변의 의사들이 아직 입증책임의 전환이라는 말에 대해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아 약간의 조바심이 난다.

일반적인 입증책임이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가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증거를 제출하여 입증을 해야 하는 책임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의 실수로 상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을 하라는 청구를 하려면 B의 실수(과실 있는 행위)와 그로 인해 상해를 입었다는 사실(인과관계)을 모두 A가 입증해야 한다.

위와 같은 입증책임은 민사소송의 기본원리이다. 만일 입증책임이 전환되어 있다면 어느 날 갑자기 A라는 사람이 B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며 1억을 갚으라고 소송을 걸어올 때, B가 A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으면 A에게 1억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돈을 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입증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불가능해 보인다.

의료사고의 예를 들어보자.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복통으로 외래에서 주사와 약물치료를 받은 후 귀가하여 그 날 저녁 집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예전에는 환자 측에서 의사가 그 환자에게 사용하여서는 안 되는 잘못된 주사나 약물처방을 하였다거나(과실 있는 행위), 입원을 시켰어야 했는데 퇴원을 시켰다는 사실(과실 있는 행위)과 그와 같은 주사나 약물 혹은 경과관찰의 미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인과관계)을 입증해야 했으나 입증책임이 전환되면 환자 측은 그 날 의사로부터 주사와 약물처방을 받고 귀가했다는 사실, 사망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되고 반대로 의사는 환자가 심근경색 등 다른 원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인과관계의 부존재)을 입증하거나 자신의 처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무과실), 환자는 충분히 퇴원해도 될 상태였다는 사실(무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의사는 사망한 환자를 마음대로 부검할 수도 없으므로 심근경색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환자가 자살하려고 가족 몰래 약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스란히 패소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위와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입증책임을 의사들에게 돌리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전부터 이미 의료과오소송은 특수불법행위로 분류되어, 일반 민사소송과 달리 엄격하게 입증을 하지 않더라도 입증이 된 것으로 보는 입증책임의 완화이론이 적용되어 왔었다.

의료소송에서는 왜 다른 일반소송과 달리 입증책임이 완화되어 있었을까.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의료행위가 극히 전문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입증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입증을 위해서는 진료기록부등의 감정이 필수적인데 진료기록부를 작성하는 사람도 의사요, 소송으로 갔을 때 진료기록부를 감정해주는 사람도 의사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모든 증거를 의사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사고 이후 진료기록부 사후조작의 문제나 진료기록 감정 시 감정의사의 암묵적인 동료의식 때문에 더욱 더 입증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 때문에 발전해온 것이 입증책임 완화와 관련된 이론이었고 세계 각국에서 이러한 입증책임 완화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완화의 정도는 각국의 의료, 경제, 사회 환경에 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판례는 과실부분의 입증에 관하여는 환자 측에서 악결과가 의료행위에 즈음하여 생겼다는 것(시간적 접착성)과 그것이 의료행위에 의해 생겼다(원인이 될 수 있는 의료행위상 과오의 정도, 통계적 빈발성, 타원인의 불개재)고 하는 정도를 입증하면 다시 의사 측에서 반증을 하지 않으면 과실이 있는 것으로 보는 정도로 입증책임을 완화 하여왔고 인과관계에 관하여는 피해자 측에서 의료상의 과실 있는 행위를 입증하고 그 결과와 사이에 의료행위 외에 다른 원인이 개재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경우, 의료상의 과실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하여 입증책임을 완화해왔다.

즉, 의사의 과실 있는 행위, 그 행위와 결과와의 인과관계, 두 가지 모두 기본적으로 환자에게 입증책임이 있어, 판사에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의 입증은 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제 입증책임이 전환되면 환자는 의사의 의료행위와 환자의 악결과만을 입증하면 되고 의사가 그러한 의료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는 그 의료행위와 결과와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한 법률의 제정은 의료소송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의사들은 방어 진료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 환자간의 불신이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더 상대방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입증책임의 전환인 것이다.

선진국에서도 인과관계에 관한 입증책임을 전환한 예는 있지만 과실에 관한 입증책임을 전환한 예는 없는데 어떠한 파장을 가져오게 될지에 관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함께 논의과정도 거친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의료계에서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국회에서 법률로 제정할 경우 발생할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그에 관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성분명 처방 등 최근 의사들을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사안들이 있지만 입증책임의 전환이야말로 지금 당장은 와 닿지 않더라도 법이 제정되어 의료소송의 천국이 되면 그야말로 의사들의 목을 죄어올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