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배려할 줄 아는 의사, 환자에게 신뢰받는 의사, 자기자신에 대해 떳떳한 의사가 되기위해 모임을 만들고 공부하는 의사들. 바로 의료윤리연구회다. 진료 환경은 열악하지만 ‘윤리적인 의사’가 되겠다는 의지로, 개원의사들이 주축이 된 연구회가 첫발을 내딛은 이후 한 돌을 맞았다. 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이명진 회장(명이비인후과)은 “흔들리지 않고, 동료를 깨워 같이 걸어갈 거다. 한 순간의 돌풍이 아닌 첫 시작이자 꺼지지 않는 불씨이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처음에는 의사협회의 임원들과 교류가 많다보니 일각에서는 선거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의혹, 기존에 있는 의료윤리학회의 분파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오해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동료들로부터는 “우리에게 족쇄가 될것이다. 미련하지않냐, 배부른소리다” 라는 원성도 가득했다. 그러나 1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사이 의료윤리의 필요성이 많이 부각되면서 이같은 오해와 비난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었다.
연구회에서는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실천윤리’를 공부한다. 현재 개원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연령대의 의사들은 의학교육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배우지 못해 진료현장에서 윤리적 문제들과 부딪치게 됐다는 것.
이명진 회장은 “의학교육이 들어온 건 일제시대인데, 당시에는 전문기술만 들어왔다. 의학은 환자의 고통을 생각하는 의료인문학ㆍ의료윤리와 전문기술이 양립해야 하지만, 윤리부분 없이 기술만 배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다보니 환자의 자율성과 프라이버시 등에 대해 다른 의사들도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배운적도, 접할 기회도 없었는데 이를 공부하고 회원들과 공유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 바로 의료윤리연구회”라고 말했다.
▲의료윤리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
“연구회는 지난 1년여간, 직업윤리와 생명윤리를 다루며 기초지식을 쌓는데 힘썼다. 앞으로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각론적인 윤리문제들로 파고들어가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할 계획이다.
진료실에서의 성범죄와 자칫 우생학으로 흐를 수 있는 예측의학, 무의미한 연명치료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예상되는 문제들이 있다. 앞으로는 이처럼 윤리적인 문제들이 점점 더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찬성 측과 반대 측이 열띤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토론을 하기 전에 중요한 건 기초지식인데, 바로 여기에 의사의 역할이 많다. 의학기술을 가장 많이 전문적으로 알고 있으며 환자를 직접 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인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되고 있는 진료실 내 성범죄, 샤프롱제도ㆍ자율징계권이 답
최근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박탈해야 한다는 법안이다.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진료실 내 의료인의 성범죄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있다.
이명진 회장은 의사가 전문가로서 바로서기 위해서는 자율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제의 원인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고,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범죄 방지 문제에 있어 이명진 회장은 의료인의 자율규제와 함께 ‘샤프롱 제도’ㆍ‘자율징계권’을 제안했다.
“샤프롱은 보호자ㆍ대동자라는 뜻이다. 샤프롱제도는 진료를 볼때 간호인력과 같은 의료인력, 보호자를 대동하는 제도다. 이는 가장 확실한 성범죄 방지체제다. 샤프롱제도는 다른 의료인력이 필요한만큼, 수가에 반영이 돼야한다. 정부는 환자가 충실히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보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같은 긍정적인센티브는 필요하다. 윤리라는 건 지키려하는 사람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환경적인 여건도 함께 갈 때 가능하다.
아울러 미국과 영국의 면허관리기구에서 갖는 ‘자율징계권’도 성범죄 방지책이 될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자율징계권은 동료감시를 의미한다. 면허관리기구는 정부가 지원하지만 그 운영은 전문가에게 일임한다. 여기서는 환자들의 불만사항을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토론한다.
이같은 샤프롱제도와 자율징계권이 있다면 환자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성범죄는 자취를 감출 것이다.”
▲연구회를 이끌면서 의료계 내부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쉽다기 보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자발적인 모임이 각 지역에서 많이 생기고, 의사협회ㆍ의학회에서 윤리교육과정을 만들었으면 하는 점이다.
현재 지역적으로 서울ㆍ인천ㆍ경기 지역의 의사들이 주로 참석한다. 따라서 자발적인 윤리연구회가 각 지역에서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의사협회 내에서 윤리교육과정을 만들었으면 한다. 개원가를 위해서 1년에 몇시간 정도를 필수로 연수강좌에 넣음으로써 회원들이 의료윤리의 필요성을 알고, 환자를 위해 준비해야 할게 무엇인지 알수 있는 기회를 접했으면 한다.
앞으로 의사사회에서 리더로 활동할 사람은 의료윤리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없으면 활동하기 힘들것이다.
향후 활동하는 의협회장은 동료들 간, 의사와 환자 간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윤리적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의사들 사이에서만 인정받는 리더는 국민들과 소통할 수 없다. 의사 뿐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의료계 리더로서 힘이 생긴다. 이는 곧 정치력이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이같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의료계 인사들이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1년 간, 회원수는 얼마나 늘었나?
한달에 한번 모임이지만 상당히 수고롭기 때문에 관심은 많이 가져도 직접적으로 회원수가 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회 각계각층에서 연구회에 관심을 갖고있다.
의사 뿐 아니라 법률가, 윤리학회 교수, 철학과 교수, 치과 의사 등 각계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이 계속 온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보좌관은 물론, 각 정당의 정책위원도 오고있다. 처음에는 의사들만을 대상으로 했었는데, 사회적으로 의료윤리가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연구회를 찾고있다.
이제는 의료윤리에 관심이 없으면 입법활동하는 게 힘들것이다. 이전에 김춘진 의원이 성범죄 의사의 면허박탈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윤리적인 면에서 균형잡힌 시각을 갖지 못한 졸속 입법이다. 법이 절차적ㆍ내용적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면이 포함돼야한다. 윤리적으로 준비가 안돼있다면 실효성ㆍ정당성 측면에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법 취지를 제대로 설정하고 법안의 효과를 고민하며 윤리적인 면을 고려해 접근해야 한다.
▲윤리적인 의사의 정의와, 앞으로 연구회의 방향성은?
환자를 배려할 줄 아는 의사, 환자에게 신뢰받는 의사, 자기 자신에 대해서 떳떳한 의사가 윤리적인 의사다. 자신이 한 진료에 대해서 정당히 받을 줄 알고, 의료계의 질서를 지켜 동료를 배려하는 의사도 윤리적인 의사다.
이처럼 윤리적인 의사가 되기 위한 연구회의 공부는 비록 작은 시작이지만 파급효과는 상당히 크다. 동료들과 기존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만 옳은 것은 옳다고 당당히 주장하고, 동료들을 깨워 함께 걸어갈거다.
연구회는 의료계 내부에 작은 불씨를 켰다. 불씨가 빨리 번져가길 원하지만 더디다고 실망하지는 않는다. 바람은 꺼지지만 불씨는 번져가듯 연구회는 불씨의 역할을 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