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 구름많음동두천 20.9℃
  • 구름조금강릉 22.7℃
  • 흐림서울 21.7℃
  • 맑음대전 24.6℃
  • 맑음대구 25.7℃
  • 구름조금울산 23.8℃
  • 맑음광주 23.4℃
  • 구름조금부산 25.1℃
  • 맑음고창 23.7℃
  • 구름많음제주 23.0℃
  • 구름많음강화 21.1℃
  • 구름조금보은 22.0℃
  • 맑음금산 23.5℃
  • 구름조금강진군 24.4℃
  • 구름조금경주시 25.0℃
  • 구름조금거제 24.9℃
기상청 제공

오피니언

박근혜 의원에게 공개서한 보낸 단체에게

안용항 의료와사회포럼 정책위원


고통 받는 환자분들이 1.더 좋고, 2.더 싼 약으로, 3.무료 치료를, 4.무한정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이보다 더 고마운 조건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딛고 있는 차가운 ‘현실’은 4가지 조건이 모두 갖춘 유토피아의 세계로 갈수 없게 막아 버립니다.

제가 이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정말 그러한 유토피아의 세계가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그 세계로 방향으로 잡는다고 해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차가운 현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건강권 문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간의 생명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통 받는 환자에게 ‘건강권’이란 것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배경인 것 같습니다. 만약 건강할 권리(건강권)가 무한정한 권리라고 생각한다면 더 좋고 더 싼 약으로 무료치료를 무한정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무한정한 건강권이라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 권리를 지켜줄 ‘의무’를 누군가가 책임져야합니다. 그 의무는 엄청난 돈과 땀을 요구 하는 무한정한 의무임이 분명합니다. 누가 그 무거운 의무를 감당해야 할까요? 바로 환자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자식이 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무한정한 의무’를 요구하는 ‘무한정한 건강권’ 이야기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헛된 꿈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그러한 꿈을 다른 사람들이 쫓아가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을 한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건강권은 그 사회가 허용할 수 있는 선에서 사회가 ‘한계를 합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합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무조건적인 힘의 대결로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유리한 비이성적이며 선동적인 합의는 어쩌면 말없는 다수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적 합의를 위해서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래의 발전을 위한 현재의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하고, 빈부 차이를 줄여서 중산층을 늘이려는 노력을 통해서 국민들의 분열을 줄이려 해야 하고, 생산의욕을 높여서 더욱 많은 생산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한 의욕도 높여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많은 변수 들을 감안해서 이성적 사회 합의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부와 가난은 적대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무한정한 건강권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료보험을 예로 생각해 봅시다. 환자의 질병 치료를 위한 비용의 일부를 의료보험에서 감당하기 위해서 부자부터 가난한 사람까지 돈을 지불합니다. 환자의 건강권을 지켜주기 위해서 발생하는 의무를 이 사람들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법에 의해 ‘강제’로 의무 지워진 사람들의 의료보험료로 건강권이라고 주장하는 권리의 일부가 충족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험료를 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환자의 치료비용이 적게 들수록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가능하면 많은 치료비용을 요구 할 것입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어서 많은 의료보험료를 낸다면 아파서 일할 수 없는 다수 환자의 치료비로 사용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가난해서 아무도 의료보험을 낼 수 없는 나라가 된다면 누구고 치료받을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의료보험료를 많이 내는 사람은 환자분들에게는 고마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즉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이 미워해야만 할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할 대상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감사의 대상일 수는 없겠지요. 부자 중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고 무임승차만을 노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들임이 분명 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현실’은 일하는 사람들의 의료보험비용으로 환자들의 치료비용이 일부 지불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건강한 부자’가 많을수록 더욱 튼튼한 의료보험 재정이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결국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가난한 환자들의 치료비용을 더욱더 많이 공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서의 생산과 소비로 부를 이루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수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수출 증대에 힘을 기울이는 방향은 나라가 부자로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일 것입니다. 만약 신약이 많이 개발되고 수출이 더욱 많아진다면 국가 전체의 부가 점점 쌓여 갈 것이라고 봅니다.

신약개발이 공공의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여러분들이 지적한 제약 산업의 신약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약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만큼 수요가 많은 제품입니다. 약 관련 산업은 신약개발이 중요한 분야일 것입니다. 신약을 개발하고 특허권을 오랜 기간 유지하고자 원하는 나라들은 신약 특허가 많은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로 미국, 유럽, 일본 등이겠지요. 이들이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겠다는 고귀한 마음만으로 약을 만들지는 않겠지요. 그것으로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공개서한을 통해서 말한 “신약개발과정에 들어간 수많은 세금과 노력은 모두 공공의 자산이지, 제약회사의 독점적인 권한이 아닌 것입니다.”라는 주장을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신약개발은 공공의 것이므로 사적으로는 개발하지 말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신약이 공공의 것이 되려면 신약의 개발은 국가의 세금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사의 이익을 위한 신약 개발은 중단을 해야 합니다.

‘현실’은 신약개발의 많은 부분이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모두 회사비용이나 연구소 비용으로 충당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개인적 이익이나 회사의 이익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이들의 개발 욕구는 사라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약이 공공성을 주장하려면 약의 개발부터 유통까지 모두 국가가 담당해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국가가 담당한다면 바로 소련이나 북한에서 벌어진 나라모습으로 되어 버릴 것입니다. 공공성을 실천하는 정치가와 관료들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은 무임승차의식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개발자들은 의욕을 상실하여 그동안 저축된 부를 모두 소진하여 가난한 빈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들은 처음에는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직업을 공공성의 영역으로 강제로 끌어 들이겠지만, 모든 부분을 장악한 권력은 점점 비대해지게 되고 결국 국민을 통제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 권력의 사탕발림에 국민들은 일하지 않고 무임승차하여 정부 권력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가들은 스탈린의 이야기처럼 “창조적 예술가란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고 말하면서 인간개조론을 운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신약개발과정에 들어간 수많은 세금과 노력은 모두 공공의 자산이지, 제약회사의 독점적인 권한이 아닌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너무나 위험한 주장입니다.

세계화와 신약개발
여러분들 중에는 비행기나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같다 오신 분들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으로, 뉴스로 외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보고 듣습니다. 우리나라도 농촌인구의 10%가 이미 외국인들과 결혼한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세상과의 교류는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금융도 그렇습니다. 미국이 어려워지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공동 대응하여 자국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국 혼자만으로는 금융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로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많큼 세계는 점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약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특허가 많은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위해서 가능하면 특허권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겠지요. 만약 우리나라도 신약을 만들어 외국에 팔려면 이들이 정한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약을 많이 가진 나라에 우리의 신약을 팔려면 그들의 조건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약이 국내 소비만을 위해서 개발되었다면, 그래서 외국에 수출할 필요가 없다면 여러분의 주장대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세계가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는 지금에는 우리나라 혼자 고립되어서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약 기준도 세계기준에 따를 수밖에 없어집니다. 우리가 주도한 세계기준을 따로 만들든지 아니면 혼자 고립되든지 아니면 만들어진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선진국 개인 수입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국가에서 선진국 수준의 약값을 내야한다고 말한다면 타당하지 않게 보이겠지요. 하지만 어느 날 우리나라가 신약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되어 있다면 우리도 지금의 선진국처럼 약값을 그런 식으로 정할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신약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되어서도 여러분들은 약값을 내려야한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국가의 부를 외국에 나누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료보험비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나라의 환자들이 혜택을 적게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의 신약을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들의 신약 개발 의지가 약해진다거나 신약을 하나 개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재투자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외국의 신약을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어 질것이고 여러분들은 외국계 신약회사들 문 앞에서 계속 데모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외국의 신약 값을 내리지는 못하고 우리의 신약 값만을 내리라는 주장은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신약이 외국에 나가는 경우도 생각을 해야 하지요. 저는, 우리가 세계의 기준을 새로 바꿀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신약 가격을 세계 기준에서 끌어 내리려는 시도보다는 거기서 남는 이익을 ‘재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신약만 가격을 내릴 경우 지금 당장의 환자의 이득은 보겠지만 미래에 다가올 후손들의 고통에 눈감는 것입니다. 신약 개발은 세계의 전쟁터입니다. 끝없는 신약 개발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다른 나라에서 개발한 신약을 먹으면서 비싸다고 하소연만 계속하는 시대를 지속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편하게 살겠다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은 국가라도 모두 책임지기 어렵습니다. 태어나서 늙어 가는 도중에 수많은 고통이 엄습합니다. 옛날에는 그냥 그러다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질병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인간의 무기력함을 그대로 받아 들여왔던 것입니다.

의학이 발전해서 이러 저러한 질병들을 고치기도 하고, 그냥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고, 과거처럼 여전히 고치지 못하는 질병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냥 유지하거나 죽어 갈 수밖에 없는 질병의 경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이러 저러한 약이나 치료 방법을 동원하지만 여전히 무력한 인간의 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들은 과거에 고치지 못했던 것을 조금이나마 고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질병 앞에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모든 질병을 국가에서 책임을 저야 한다는 이상론에 빠져서, 이 이상을 실현하기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저축해두고 미래를 위해서 사용해야할 비용들을 오늘 다 사용해버린다면 미래는 더욱 암울 해 질 것입니다.

기업이 부를 쌓는 것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직장과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기업과 그렇지 않는 기업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된다고 봅니다.

내일의 후손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받아 들일만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무리한 비용 사용방법을 선택할 경우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후손들에게 가난만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