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 인권의학연구소가 의대 · 의전원 학생 1,763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온라인 · 심층 면접을 통해 진행한 의대생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의대생의 49.5%는 언어폭력 △16%는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학생은 성희롱 · 성차별에서 남학생보다 더 심각하게 노출된 상황으로, 특정 과에서는 여성을 받지 않는 전통을 만들어 이를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주입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피해 학생들은 진로 · 자기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불과 3.7%만이 대학 · 병원에 신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이 대학 내 폭력 · 성희롱 · 성차별 등 부당한 대우가 만연한 원인을 의대협에서는 '위력에 의한 인권 침해'로 지목하며, 학생의 역할 · 지위를 의료법에 명확하게 명시하여 권위주의 문화를 해소할 것을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에 주문했다.
23일 오후 2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의과대학 학생들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에서 인권의학연구소 이화영 책임연구원이 '의대생 인권 개선 방안' 주제로 발제했다.
이 연구원은 인권 개선과 관련한 최우선 과제로 크게 △인권 교육 · 정기적 실태조사 △교내 권위주의 문화 철폐 △강력한 가해자 처벌 △철저한 피해자 보호 △성폭력 · 성차별 예방 등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먼저 성차별 · 성희롱 · 성폭력 예방 · 대응을 위한 교육지침안을 마련하여 교수 · 학생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필수과목으로 의료인문학에 '의료와 인권' 과목을 개설하여 전 학생에게 최소 한 학기 이상 정기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의과대학협회(이하 AAMC)는 매년 졸업생 대상으로 부당한 대우와 관련한 전수조사를 시행하여 전 의대에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AAMC와 같은 노력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으로, 의대 졸업생만이라도 정기조사를 시행하여 현황 파악 후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음주 강요 및 동문회 · 향우회는 권위주의 문화를 재생산하는 요소로,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고 했다.
현재는 동아리 · 동문회 · 향우회를 통해 족보 문화 경향이 증폭되며, 일부 동아리는 특정 과를 들어가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족보를 학생회가 공개적으로 관리하여 모든 학생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저학년에서 폭력을 경험한 학생이 상급자가 됐을 때 지위가 낮은 학생이나 전공의 · 간호사에게 폭력을 행할 위험성이 높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이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학교 당국은 학생 선발 과정에서 성 인지 감수성을 질문하고 양성평등 교육을 필수로 하며, 이를 국가고시 필수조건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으로 강력하고도 공정한 가해자 처벌을 강조했다. 가해자 · 피해자 분리를 비롯하여 교내 신고 · 조사 · 징계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본 대응 지침안 마련을 주문하는 동시에 교내 자정 노력이 없을 시 외부 사법기관 · 국가기관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성희롱 ·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를 문제시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2차 피해 · 보복에 대한 인식을 제고해 철저하게 피해자 중심으로 조치해야 한다.
이 연구원은 "이번 조사에서 교육과정 · 동아리 내 여학생 대상의 성희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고, 가해자를 감싸는 남학생들의 저조한 성 인지 감수성도 확인했다. 여성을 선발하지 않는 특정 과가 존재하는 구조적 성차별 문제점도 발견했다. 특정 과에서 여성을 안 뽑는 문제는 피해 학생만 인지할 뿐, 아무도 인지하지 않는다."며, "학교 당국은 성차별 · 성희롱 발언을 한 교수 대상으로 경고 · 징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관은 전공의 선발 과정의 공정성 · 투명성 조사를 해야 한다. 전문과목 선택에서 여성 배제는 분명한 성차별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교육부 · 복지부 · 국가인권위원회는 의대 입학 과정 · 전공의 선발 과정에서 여성 비율 등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특정 과가 여성을 배제할 경우 인턴 · 레지던트 정원을 축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장기 과제로 △의료법 · 전공의법 개정 △한국의학교육평가원 평가기준 개정 △의료기관평가인증원 평가기준 개정 △인권위에 의료기관인권전담팀 설치 등을 제시했다.
법 개정에 대해 인권위는 의대생의 인권 보호 사항을 추가하도록 권고했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평가항목 개정과 관련해서는 △'부당한 대우'를 세부항목이 아닌 기본 기준에 제시하며 △의료인문학 항목에서 '인권과 의료' 교육을 전 학생이 이수하게끔 세부항목을 바꾸고 △전체 의대 평가를 위해 매년 학생 대상 폭력 · 강요 · 성차별 · 성희롱 등 '부당한 대우' 실태조사를 실시하도록 권고했다.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의 평가인증 기준에 대해서는 △'직원의 안전' 항목에 실습 중인 의대생의 안전을 포함하고 △의료기관 평가에 전공의 선발과정 및 투명성에 대한 평가 항목을 포함하며 △전공의 선발과정에서 특정과의 여성 전공의 배제 · 차별 실태조사 시행을 권고했다.
이날 토론에는 △대한의과대학 · 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이하 의대협) 김서영 회장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이승우 회장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침해조사과 차승렬 조사원 △교육부 대학학사제도과 김정훈 사무관 △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권근용 사무관 △한국의과대학 · 의학전문대학원협회(이하 학장협) 한희철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의대협 김서영 회장은 "교수 · 학생 간에는 명백한 권력 관계인 피라미드가 존재하며, 피라미드에서 학생은 가장 약한 존재다. 나는 피라미드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모든 권력의 상호작용이 '위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실체라고 생각한다."며, "교수 · 전공의 · 학생 모두는 자신이 피라미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특히, 상층에 속한 사람일수록 본인의 발언 · 행동에 자기가 가진 권력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대생 인권을 복지부에 문의하면 교육부 소관이니 교육부로 가라고 하고, 막상 교육부에서는 병원 문제이니 복지부로 돌려보내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학생 역할 · 지위를 의료법에 명확하게 명시하여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해달라. 법에 명시가 있어야 권위주의 문화의 영향이 줄어들 수 있다."며, "현재 복지부의 성평등 자문위원회 위원에는 교수 · 민간위원 · 시민단체가 있으나 학생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자문위원으로 학생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의대생 인권을 언급할 때 선배들은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다', '과거에 비하면 나아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학생은 의료계 발전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다. 피해자 한 명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개선해야 한다. 인권 문제는 나중이 없다. 다른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협 이승우 회장은 "협회에서 의대생 인권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진행하여 계속 사례를 모으고 얘기해야 한다. 대전협에서도 여러 실태조사를 진행한 끝에 복지부에서 지침이 만들어졌고 지난해 12월 27일에는 폭행 방지를 포함한 전공의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이런 외부의 힘을 빌리는 건 결국 의료계 자정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반성해야 하며, 이제는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이번 조사를 계기로 교수 · 전공의가 반성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만일 의대생 인권 침해 상황에서 전공의가 가해자인 경우 대전협에서는 해당 사례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중앙윤리위원회에 회부하겠다. 대전협에서는 해당 전공의 회원을 보호하지 않겠다. 협회 차원에서 나서서 해당 회원이 윤리적 · 인권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의협 중앙윤리위원회를 통해 의사 자격이 있는지도 따져볼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전공의 대상 성차별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임신 전공의 문제라고 했다.
이 회장은 "여성 전공의를 차별하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의대 여학생 비율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전공의 10명 중 3명이 여성이지만, 선발 과정에는 남성주의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여성 전공의를 선발하지 않는 이유 중 가장 심각한 건 임신이다. 실제로 면접 때 '임신할 거냐'고 물어본다. 분명히 근로기준법에 의거해 모성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여성 전공의는 소외되고 있다. 이 문제는 인권위도 유심히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권근용 사무관은 "의대의 악습을 완전히 금지하는 게 권위주의 문화 철폐의 답안일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인권 문제를 강제로 풀지 않고 좀 더 효율적으로 풀 방법은 없는지도 고민해야 한다."며, "가장 큰 문제는 신고다. 신고로 드러나야 하는데 드러나지 못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조직의 전문성이 높을수록 배타적인 바운더리를 갖게 되며, 조직에서 낙오되는 불안감 등이 그 안에 존재한다. 이 부분을 깨고 피해자가 용기를 낼 수 있게 하는 공적 개입이 어떤 게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사무관은 "전공의도 마찬가지로 수련 과정에서 낙인을 걱정하며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고를 주저하는데 신고 시 비밀 보장을 하고 이동 수련을 시키며 수련환경평가위원회 · 병원 차원에서 조사 · 대응을 의무화하는 정도만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다. 이런 부분을 의대생 측면에서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며, "결국 의료계 내 자정 노력이 일어나야 하므로, 의대 학장단 모임이나 의협 · 대한의학회 등으로 구성된 상설협의체 · 대화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인권 문제는 전공의 ·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 의료기사 등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의대의 경우도 '공대 · 사범대 · 체대는 괜찮냐'는 문제와 맞닥뜨린다. 즉, 모든 부분과 연관돼 있어 이를 법 · 제도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해당 문제가 독자적인 심각성 · 특수성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취지는 충분히 공감하나 방법은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할 것 같다."며, "복지부에서는 직업윤리에 대한 시행규칙을 개정 · 강화했고, 전공의에 대한 인권교육 · 의료윤리교육을 필수 공통 역량으로 오는 2월에 개정하려 한다. 그런 부분부터 시작해서 같이 고민해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