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여를 전면 급여화하는 정책 과정에서 전문가 참여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정작 나서야 할 전문가들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22일 오전 9시 30분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한 '신의료기술평가 10주년 기념 국제 컨퍼런스'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김윤 교수가 '문재인 케어와 의료기술평가' 주제로 발제를 맡고, 이와 같이 지적했다.
김윤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 비급여를 급여화로 전환하는 건강보험 보장성 정책이 실패한 원인은 새로운 비급여가 발생하거나 다른 비급여 가격이 높아지거나 하는 등의 비급여 풍선효과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정부가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라는 정치적 구호를 외친 까닭은 기존의 항목별 급여 방식이 보장성을 강화하거나 재난적 의료비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 됐다는 과거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면서, "그런데 비급여를 예비급여로 전환하게 되면 환자 본인부담금이 감소해,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인식이 강한 수도권 · 상급종합병원으로 쏠릴 우려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의료전달체계가 붕괴해 있고, 1·2·3차 병원을 환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전면 급여화가 이뤄지고 의료전달체계에 칸막이가 없게 되면 의원급 의료기관 환자 수는 줄어들고, 상급종합병원 쏠림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다."라면서, "1차의료를 강화하려면 동네 의원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건강보험 급여범위 내에 서비스를 추가해야 하며, 급여화되기 이전에 안전성 · 유효성 · 경제성 등 기술평가가 있어야 근거 기반의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1차의료기관에서 어떤 서비스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과연 어떤 기관이 맡아서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런 기관은 국내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 교수는 "동네 의원은 경증 진료,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진료 등 1·2·3차 병원에서 맡아야 할 환자는 각각 구분돼 있다. 원가보상 측면에서는 대학병원에서 감기 환자를 진료하는 데 5만 원이 들었다고 하면 5만 원을 보상해주는 게 적정수가이다. 그런데 적정수가 개념은 각 유형의 병원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했을 때 정당하게 보상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기 역할에 맞지 않는 환자를 진료하면 원가 이하의 보상이 적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유형과 역할을 고려해 적정수가를 책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과 근거, 사회적 합의 도출은 누가 만들고 해야 하는 걸까? 역시나 없다."라며 현 의료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했다.
한편, MRI, 초음파 검사 등 이미 급여 범위에 들어와 있는데 특정 진단에서만 급여를 인정해주는 '기준비급여'가 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기준비급여라는 것을 만들어서 진료비를 통제해왔다. 또, 의학적으로 필요한 비급여와 불필요한 비급여가 뒤섞여 구분 안 되는 상태가 지난 수십 년간 역사였다. 문 케어에서는 기준비급여를 '건강보험 적용 횟수 · 개수 제한 안 하고 건강보험 범위 안에 넣어서 급여화하겠다'라고 했고, 이제 기존의 통제 방법에서 벗어나 의료이용량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기제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사회적 기제란 기준비급여를 성공적으로 없애고, 의료이용량 통제를 과거 심사기준에서 '전문가' 중심으로 변화시키는 것.

김 교수는 "현재 의학 전문 학회들이 만드는 가이드라인은 이불 쓰고 만세 하는 꼴이다. 자기만족으로 만드는 거다. 가이드라인이 의료정책에 스며들고 정책 기전으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런데 학회들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려고 나서면, 의협이 '니들이 뭔데?'하고 간섭한다. 의협 비대위가 반대하고 있으니 각 학회가 위축돼 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예비급여 상당수는 유효성과 경제성은 있는데 불확실성을 갖는 기술이고, 그 항목들이 예비급여 범주에 들어오면 근거를 생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정부는 3~5년 이후에 급여, 예비급여, 비급여 여부를 정하겠다고 했다."라면서, "비급여를 급여화하면 벌어지는 일은, 이전에는 임상 의사들이 식약청 허가사항 이외에 임상적으로 판단해 자유롭게 약을 처방했다. 비급여가 없어지면 공식적인 승인을 받아서 사용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경우가 식약처 허가 없이 쓸 수 있는 경우인지에 대한 지침은 누가 만들까? 주기적으로 근거를 업데이트하고 합리적 · 의학적인 처방이 이뤄지게 하는 것도 역시 과제이다."라고 말했다.
평가에 대해서 김 교수는 "심평원이 현재 적정성 평가를 맡는다. 학회들과 협력해서 지표를 만들지만, 주체는 역시 심평원이다. 심평원은 비용과 의료 질을 고려해 전체 비용을 관리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평가는 강화될 게 뻔한데, 평가에 필요한 지표는 누가 만들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상 합의된 계획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심평원이 사용하는 평가 지표는 제3의 기관이 만들고 관리하는 게 공정체계이다. 그 일은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예비급여를 급여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가 가진 자원의 양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에 따라서 기술을 평가해 급여화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합의가 투명해야 하고 새로운 근거가 나오면 기준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예비급여 전환에서 ▲예비급여 전환 절차와 역할 규명, ▲의료 남용 방지 차원에서의 예비급여 모니터링 및 평가, ▲수가 산정 및 관리, ▲비급여 관리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김 교수는 "비급여를 예비급여로 전환하는 정책 이전에 선별급여로 전환하는 과정이 있었다. 선별급여는 40여 개의 비급여를 전환하는 거고, 예비급여는 3,800개의 비급여를 전환한다. 그런데 예비급여는 대부분 재료여서 상대적으로 전환이 용이할 거로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선별급여를 결정하는 위원회는 급여평가위원회와 전문평가위원회로 이원화돼있다. 전문평가위원회에서는 급여 여부를 결정하고, 급여평가위원회에서는 비급여를 선별급여 또는 예비급여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판단한다.
김 교수는 "문제는 두 위원회 중 무엇이 상위결정이 돼야 하는지다. 어느 위원회가 최종 결정에 더 적합한 위치에 있는지가 새로운 급여결정 체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고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편, 이날 토론에서는 '의료기술평가의 미래전략: 의사결정 기준의 다변화' 주제로 서울대 의대 박병주 교수가 좌장을 맡고,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김석현 · 박종연 본부장, 중앙대 의대 김재규 교수, 서울대 의대 김윤 교수, 아주대 의대 허윤정 교수가 참석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박종연 본부장은 "문 케어는 신의료기술을 발전시키고 의료기술평가의 전환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령화, 만성질환, 새로운 기술의 발전 등 시대가 변하면서 신의료기술평가가 부정적으로 인식된 측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러한 점을 극복하고 확장 ·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평가대상을 확대하는 문제, ▲방법론을 다양화하는 것, ▲개별 의료기술평가에서 융합기술평가 등 새로운 기술평가로 발전하는 것 등이다. 이번에 예비급여가 새로 도입되는데, 예비급여항목을 평가할 때 방법론적 접근이 중요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전향적인 의료기술평가로 향후 사회의 변화에 부응하는 의미 있는 평가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김석현 본부장은 "신의료기술평가가 시행되기 전에는 심평원의 급여등재리스트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 의료기관에서는 등재신청을 해놓고 비급여 행위를 해왔고, 환자도 비급여 행위에 대해 크게 인지 안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의료행위와 관련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현재 신의료기술평가가 시행되면서 행위 안전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과하게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안 본다는 논란은 없다."라고 설명했다.
박 본부장은 "신의료기술평가의 모순은 의료시장 진입을 원천적으로 책임지고, 부적격하다고 판단할 시 진입 못 하게 하는 Blocker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적절한 평가가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지금과 같이 신의료기술평가를 강력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라고 말했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허윤정 교수는 "김윤 교수의 발제 내용 중에 비급여를 급여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이슈가 있다고 본다. 김윤 교수는 과거 행위별 심사 방식에서 전문가들이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평가하는 방식인 전문가 중심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선순환으로 연결될 수 없다. 전면 급여화의 핵심은 전문가들이 키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허 교수는 "4차산업 혁명이 흡사 몇 년 안에 도래할 것처럼 예견하는데, 모든 기관이 믿고 활용할만한 빅데이터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많은 자료가 쌓여있다고 과연 빅테이터라 말할 것이며 이들이 활용가치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윤 교수에 앞서 '근거기반의학의 미래' 주제로 발제를 맡았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김재규 교수는 "허윤정 교수의 빅데이터가 준비가 안 됐다는 말에 동의한다. 연구 과정이 잘못돼왔기 때문에 그렇다. 연구과정 제대로 하고 건전하게 했으면 데이터가 잘 쌓였을 것이다. 또, 집행 담당자가 과중한 노동에 직면해 있어서 잘 케어할 수 없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기회가 왔어도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AI 전문가의 존재 여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실제 구현해낼 수 있는 전문가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회의감도 든다. 4차 혁명을 우리가 피해갈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무늬만 할 게 아니라 정말 책임질 사람 골라서 잘 진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김윤 교수의 발제에 대해 김재규 교수는 "학회는 학문을 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다. 학회에 보험 진료 지침을 만들라고 하면 보험기관이 되는 거다. 그리고 가이드라인은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올바른 진료를 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지침서이다."라면서, "전문가가 나서야 하는 건 맞는데 학회 정체성을 생각한다면 과연 학회가 해야 할 일인지 의문이 든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문가에게 사회적 책무 · 의무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환경이 뒤따라야 한다. 정책 변화가 있을 때 전문가 참여를 쉽게 한 줄로 결정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김윤 교수는 "우리나라 학회는 아카데미즘(Academism)이 강하다. 학문과 연구를 정치적 도피처로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정책을 요구하다가 막상 책임져야 할 순간에는 아카데미즘 우산 아래로 숨어버리는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문 케어가 정책으로 집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기 전에 예견된 거였다. 유력후보 대부분이 비슷한 공약을 걸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 시점에서는 준비돼 있어야 했다. 보장성 강화라고 하는 정책적 환경에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비전과 조직개편을 가지고 대비할 건지에 대해 오늘 얘기했어야 했다. 여전히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거 하라고 누군가 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싶다."라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전향적인 자세와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