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시각이 변하고 있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발표한 국민건강 관련 인식조사에 따르면, 내년도 의대 정원을 동결하고 이후에는 정부가 설치한 의료인력수급추계위원회의 결정에 따르자는 의견에 많은 시민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는 2023년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 당시와는 상반된 반응이다. 시민들은 이제 숫자보다는 합리적인 절차와 사회적 합의가 의료개혁의 성공을 좌우할 것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올 5월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건강 관련 인식조사’ 결과는 의료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관점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 ‘정원 확대’보다 ‘합의 중심의 단계적 조정’
이번 조사에선 내년도 의대 정원 동결(57.9%)과 2027년부터 추계위 결정에 따르자(68.6%)는 데 시민 10명 중 6~7명이 찬성했다. 이는 2023년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 당시 시민들은 높은 지지를 보낸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다.
한편 응답자의 대부분은 의료개혁 갈등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94.3%)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개혁에 성공하려면, 정책 결정 시 ‘의대 정원에 대한 사회적 합의’(37.3%)와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 보장’(36.0%)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많았다. 또 추계위가 성공하려면 과학적 근거를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은 8.3%로, 2023 의료개혁 당시 가장 강력한 근거로 제시됐던 ‘과학적 근거’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의정 갈등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인식도 ‘숫자’보다는 ‘합리적 절차와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하며, 시민 공감과 참여 없는 개혁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 필수의료 공백 문제는 정부 책임
이번 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필수 의료를 시장에 맡기지 말고,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사 결과 10명 중 9명이 ‘중앙정부가 인력·시설·장비를 직접 지원·관리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며, 필수의료 전공의의 수련비를 전액 지원하자는 데 찬성하는 의견이 10명 중 8명 가까이 됐다.
의료개혁의 기본 문제의식인 의사들의 ‘필수과 기피’ ‘지역 의료 붕괴’ 등 의료 공백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는 여전함을 보여준다. 그런 한편으론 과잉진료 등 의료과잉 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의료소비자 책임감이 더 높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 의료과잉 문제의식 높지만, 실제 참여는 글쎄
조사 결과 시민의 절대 다수는 의료과잉 존재를 인식(97.8%)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의 심각성(85.4%)에 대한 공감도 높았다. 응답자 10명 중 9명은 의료소비자로서 과잉진료 절감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참여하고 싶다는 데 동의했다.
보건복지부는 2024년 7월 1일부터 연간 외래진료 횟수가 365회를 초과할 경우, 초과분에 대해 본인부담률을 90%로 높이는 개정 시행령을 시행한다. 18세 미만, 임산부, 장애인 등은 예외이며, 이는 과잉진료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과잉진료 절감의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참여 방식’에 대해선 여전히 의료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의료진을 신뢰해야 한다’(92.3%), ‘의사와 상의하며 진료 결정해야 한다’(89.6%)는 응답은 높았지만, 건강보험료 인상(39.1%)이나 병원 예약 위약금(74.7%) 같은 직접적 부담엔 거부감이 컸다. 이는 의료소비자 들이 문제는 인식하는 반면 실질적 참여 모델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의료개혁'은 이제 설득과 상호 이해 단계로 발전해야
윤영호(서울대 의대 교수) 사업단장은 “이번 조사에선 정책이란 기본적으로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의료 개혁도 국민·의사·정부가 함께 해법을 도출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먼저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국민이 의료 개혁의 주체로 참여하기 위해 과잉 의료 행위와 약 처방을 줄이고, 스스로 건강을 돌보는 똑똑한 의료소비자가 돼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점도 이번 조사에서 두드러진 분야로 윤 교수는 꼽았다.
윤 교수는 “똑똑한 의료소비자는 ‘건강 민주화’의 전제”라며 “차제에 공공의료 지원을 강화하고, 국민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 도입과 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료에 ‘설탕세’를 도입하는 등의 제도 마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 측은 “이번 조사 결과, 의정갈등 2년째에 접어들며 시민들이 의료 문제를 ‘전문가만의 영역’으로 치부하던 기존의 관점에서 나아가 ‘시민과 공동 설계하는 공공정책’으로 인식하는 단계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