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조원의 제약산업에서 3조원이 뚝 잘려나가는 약가인하 정책이 발표되자 제약업계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 약가인하로 인해 국내 제약산업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업계의 주장이 당장 내년부터 현실화된다.
이제 제약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생계형 기업’에 머무르게 될 것이며, ‘글로벌 기업’의 꿈은 공중분해 됐다는 분노가 속출하고 있다.
◇장담할 수 없는 불분명한 미래에 투자하라고?
제약협회에 따르면 정부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기존 보험약가인하 8,900억원과 작년 10월부터 시행한 시장형실거래가제도에 의한 매출 감소(연간 최소 5,000억원에서 최대 1조원) 등 1조~2조원의 피해가 진행 중이다.
여기에 더해 12조 8,000억원 시장에서 3조원을 일시에 인하하는 과도한 조치는 현재 제약산업의 기반과 역량으로 이를 감내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신약개발에 재투자할 최소한의 수익구조가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R&D 투자율을 높인다는 것은 사실상 현실불가능하다는 것.
한국은행이 확인한 제약업종의 생산원가가 54% 수준인데, 53.5%대의 가격으로는 R&D는 물론 정상적으로 기업을 경영해 나갈 수 없는 수준이다.
더구나 개발 기간도 길고 성공할지 실패할지 결과가 장담되지 않는 리스크 높은 연구에 투자할만한 기업이 얼마나 될지부터 의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위기다.
◇‘혁신형 기업’? 지금 우리는 ‘생계형 기업’
이를 위해 정부는 ‘혁신형 제약기업’을 선정해 각종 혜택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오히려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복지부는 혁신형 제약기업 선정과정에 대한 예시로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투자비율을 ▲연간매출액 1,000억원 이상 기업 : 7% 이상 ▲연간매출액 1,000억원 미만 기업 : 10% 이상 등으로 제시했다.
매출액 대비 R&D투자율이 높은 업체들로는 LG생명과학(19.3%), 한미약품(13.6%), 종근당(9.4%), 동아제약(7.7%), 녹십자(7.2%)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혁신형 기업이라는 발상 자체가 ‘뜬구름 잡는’ 허무한 얘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매출이 줄어들면 판관비와 R&D비용부터 줄이는 것이 기업이 살 길이다. 당장 기업이 어떻게 수익을 내야할지 막막해지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를 해야 살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어떻게 납득해야 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타 산업에 비해 신약개발은 리스크가 상당히 크다는 점에서 정부가 투자했다 실패한 경우 어떻게 보상해 줄지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없다”며 “‘혁신형 기업’ 말은 좋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모두 ‘생계형 기업’이 된 처지다”고 호소했다.
◇‘퍼스트제네릭’ 폐지…개발능력 있는 회사들 다 죽여
아울러 계단식 약가산정 방식이 폐지되면서 사실상 ‘퍼스트제네릭’이 사라진데 대해서도 반발이 일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퍼스트제네릭을 개발한 업체들은 신약개발 능력을 갖춘 회사들로 봐야한다”며 “퍼스트 제네릭의 약가우대 정책을 폐지함으로써 개발능력을 키워왔던 회사들이 오히려 더 큰 타격을 보는 꼴이 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번 약가인하 정책은 신약개발과 퍼스트제네릭 생산 기술력에 투자하며 경쟁력을 쌓아 온 상위업체들에게 ‘제 살 깎아먹는’ 개발을 해왔다고 선고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결국 상위제약사들의 내년도 매출액이 기존 예상치보다 많게는 1,000억원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오는 2012년 9,900억원~1조원 수준의 매출이 기대됐던 동아제약의 경우 약가인하 정책 발표 직후 각 증권사들이 예상치를 9,000억원~9,200억원대로 대폭 낮추고 있다. 증권가 예상대로라면 약가인하로 내년 한해에만 약 1,000억원 가량의 손실이 나는 셈이다.
◇이경호 회장 ‘1조원 감수’ 발언, 엇갈린 반응
이런 가운데 지난 18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제약협회 이경호 회장이 “1조원의 약가인하까지는 감수하겠다”는 발언을 두고 업계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이 회장의 발언이 정부의 약가인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반발하는 목소리와 정부의 의지가 확고한 만큼 피해액을 줄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반응으로 갈리고 있는 것.
한 제약사 관계자는 “최근 들어 제약업계에만 가혹하게 적용되고 있는 각종 규제정책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참고 있던 것은 ‘을’이라는 업계의 위치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기업들의 생존이 달린 만큼 다같이 죽을 각오로 막아내도 시원치 않다”며 “이런 상황에 제약업계를 대표하는 인사가 약가인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발언을 하며 한발 물러났다는 것이 어이가 없다”며 불쾌해 했다.
이에 대해 모 중견제약사 임원은 “정부의 의지가 강력한 만큼 약가인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번 사태를 냉정한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피할 수 없다면 피해를 줄이는 방안을 연구해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빠른 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