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의료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앞다투어 내놓는 ‘의과대학 신설’과 ‘대학병원 분원 유치’ 공약은 젊은 의사들에게 참담한 기시감을 줍니다.
백년지대계가 돼야 할 의료 정책이 선거용 ‘선심성 공약’으로 전락할 때, 미래 세대의 부담과 국민의 건강권 침해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전공의협의회는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진행되는 의대 정원 증원 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힙니다.
1. 미래 세대의 재정 부담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AI 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성 변화를 합리적으로 반영하라.
현재 정부의 의사 인력 수급 추계는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대통령께서는 AI 기술이 의료 인력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으나, 실제 추계 모형에 반영된 AI 생산성 기여도는 약 6%에 그치고 있습니다.
의사인력수급추계위원회(이하 추계위) 11차 회의자료에 의하면, 제시된 추계모형을 기반으로 진료비를 환산할 경우, 2040년 약 250조 원에서 2060년 최대 700조 원 규모의 지출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재정 문제는 추계위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일부 위원의 의견으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상충하는 데이터에 기반해 무리하게 증원을 밀어붙이는 것은 국가 재정과 청년 세대에게 막대한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처사입니다.
향후 10년 내 생산가능인구가 약 2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의료비 지출의 급격한 증가는 청년 세대의 조세 및 사회보험 부담을 현재 수준의 두 배 이상으로 확대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재정적 영향은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돼야 합니다. 특히 향후 부담을 감당하게 될 젊은 세대의 사회적 동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 해법은 ‘증원’이 아니라, 현장 의료 인력에 대한 ‘보장’에 있다.
지역 의료의 핵심은 단순한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배치와 지속 가능한 근무 환경에 있습니다. 미래 인력 양성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 일선에서 헌신하고 있는 전공의와 젊은 의사들이 자부심을 갖고 머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현장에 있는 숙련된 인력들이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를 떠나지 않도록 실질적인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법적 안전망을 구축하십시오.
또한 지역의 의료 기반은 의료진만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수도권으로 환자가 쏠리는 현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역 의료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직시해야 합니다. 젊은 의사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증원 정책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입니다.
3. 의학교육과 수련 현장의 한계를 직시하고 붕괴를 막아야 한다.
현재 의학교육 및 수련 현장은 심각한 한계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작년에 급격한 증원이 이뤄진 일부 의과대학은 24·25학번 더블링 문제와 더불어 강의실과 실습 기자재 부족은 물론, 카데바 확보조차 어려운 상태로 파행적인 학사 운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교육의 핵심 주체인 젊은 교수진의 지역 수련병원 이탈 현상 또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충분한 교육·수련 환경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출되는 의료 인력은 국민 건강에 장기적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적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원 확대는 결국 정책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며,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너져가는 교육 현장의 정상화입니다.
4. 충분한 숙의 기간을 거치고 추계를 정치와 분리하라.
정부는 과학적 근거 마련을 위해 추계위를 출범시켰으나, 추계위는 출범 이후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결론을 도출했으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이하 보정심)는 구정 연휴 전 결론을 내려 하고 있습니다. 급한 결론 도출은 추계위의 설립 취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일정에 따라 흔들리는 정책은 사회적 갈등만 유발할 뿐입니다. 본 협의회는 추계위를 통해 최소 1년 이상의 충분한 기간 동안 데이터 분석과 정책 효과 검증이 이루어질 것을 촉구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는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부디 정치적 고려가 아닌, 교육 및 의료 현장의 현실과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중심에 둔 책임 있는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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