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에서 말기환자의 의료결정과 관련된 용어 ‘연명의료중단등결정(법률상 용어, 이하 연명의료결정)’, ‘의사조력자살’, ‘안락사’에 대한 인식 혼란이 여전히 심각하며, 특히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주관적 용어가 다양한 의료행위를 구분하지 못해 여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됐다.
성누가병원 김수정·신명섭 연구팀과 서울대 허대석 명예교수(한국보건의료연구원)가, 2024년 6월, 전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말기환자의 의료결정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해당논문은 대한의학회지 2025년 최근호에 게재됐다.
설문 참가자들에게 안락사, 의사 조력 자살, 연명의료결정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객관적 용어를 선택하게 한 결과,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률은 85.9%로 높았으나, 안락사(37.4%)와 의사 조력 자살(53.8%)의 정확한 인식률은 연명의료결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특히, 주관적 용어인 '존엄사'는 세 가지 의료 행위를 효과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의 원인으로 드러났다. 연명의료결정 시나리오 응답자의 57.2%, 의사 조력 자살 시나리오 응답자의 34.3%, 안락사 시나리오 응답자의 27.3%가 이를 '존엄사'로 인식했다.
연구진은 “'존엄사'라는 용어가 실제 의료 행위의 법적, 윤리적 구분을 흐리게 하며, 앞서 시행된 다수의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시켰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응답자들에게 ”본인이 말기암 환자라면 어떤 결정을 택하겠는가?“를 묻자, 연명의료결정 41.3%, 안락사 35.5%, 의사조력자살 15.4%, 연명의료 지속 7.8%로 나타나, 국민 다수는 삶을 인위적으로 단축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인한 고통의 연장을 거부하는 결정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말기 의료 결정에 대한 논의와 정책 수립 시, 용어의 정확성이 국민 여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특히 '존엄사'와 같은 모호한 용어 사용을 지양하고, 연명의료결정, 의사 조력 자살, 안락사와 같이 객관적인 의료 행위에 기반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단순히 용어에 대한 찬반보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와 맥락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 이명아 이사장(교수, 서울성모병원)은 “이 연구는 한국 사회가 생애 말기 의사결정의 핵심개념을 여전히 혼동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존엄사’라는 표현은 따뜻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안락사와 연명의료결정을 뒤섞는 위험한 언어적 착시를 일으킨다. 이제는 ‘죽음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단계를 어떻게 존엄하게 살 것인가’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 학회는 앞으로 정부, 의료계, 언론과 협력해 통일된 용어체계와 국민 대상의 교육·홍보를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이 연구가 규명한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생애말기 돌봄의 방향을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