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신경과 의사가 의대를 꿈꾸는 청소년에게 권하는 15권의 책을 모아 소개하는 일종의 메타북이다. 역사학자나 지리학자를 꿈꾸던 문자 중독의 저자는 어쩌다 의대에 입학했고, 재미없는 의학서만 읽으며 책과 멀어졌다가 제주도 공보의로 발령받으면서 다시 도서관을 찾게 된다. 그렇게 의학뿐 아니라 의학과 관련된 인문학, 신화, 문학, 예술, 철학 분야의 책을 두루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의학에 대한 풍부한 배경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몇 권의 책까지 출간한 저자가 되었다. 그동안 예비 의대생이나 초보 의사에게 권하는 책은,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닥터 노먼 베쑨》, 《암병동》, 《페스트》 등이었다. 물론 훌륭한 책들이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추천 도서의 목록도 바뀔 필요가 있다. 그래서《의대로 가는 중입니다》에서 선택한 책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되어 가독성이 좋고, 의학과 과학지식을 담고 있으며, 의사의 역할이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해서 청소년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메스를 잡다》는 수술의 역사라고 할 만큼 아주 특별하고 다양한 수술을 다루고 있다. 마취가 없던 시절의 수술부터, 팔레비 전 이란 국왕을 수술하다가
롤러코스터에 앉아 뼈가 부러지다외신에 따르면 일본의 한 놀이공원있는 롤러코스터가 잇따른 사고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트랙을 이탈하거나 중도에 멈춘 사고를 낸 것이 아니라정상적으로 운행을 했는데 탑승객들이 원인 모를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지름이 40미터에 이르는 롤러코스터 <도도돈파(Do-Dodonpa)>는 2001년에 설치되었고 2017년에는 성능을 향상시켜 1.56초 만에 180km/h까지 급가속할 수 있었다. 속도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빠른 롤러코스터다. 그런데 이듬 해인 2018년부터 최근까지탑승객 9명이 등뼈, 목뼈,팔뼈가 부러졌다. 2021년 8월 초에 운행이중단되었다. 시속 180km는 강력한 태풍의 풍속(50m/s)과 비슷하다. 하지만 KTX의 300km/h보다느리다. 국제선 여객기들의 속도는 900km/h가 넘으며국제우주정거장(ISS)은 28,000km/h 속도로 지구궤도를돈다. 내친 김에 인간이 겪은 최고 속도기록을 살펴본다면 아폴로 10호가 달 궤도에 다녀오면서 세운 40만km/h이다. 우리가 익숙한 80km/h의 5,000배에 달하는 속도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를 견디기 힘들었을까? 아니다. 아폴로 우주인도 음속 2배로여행한 콩코
얼마 전에 1960년대를 배경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인 두 라이벌 회사의 이야기를 다른 영화 <포드와 페라리>를 보았다.그 영화를 보고서야, ‘엔쪼’가 무엇인지 처음알았다. 페라리의 설립자인 엔쪼 페라리(EnzoAnselmo Giuseppe Maria Ferrari;1898~1988)의 이름이었다. 더하여페라리가 아니고 “페라아~리”로 발음한다는 것을, 페라리가 가문의 성(姓)이란 걸 알았다. 그러고보니 포드, 크라이슬러, 벤츠, 토요타, 혼다,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롤스와 로이스, 포르셰, …모두 사람의 성에서 따온 브랜드네. 그렇게 치면 우리 자동차 브랜드조정, 김, 이, 최, … 이렇게 되었어야 했을까? 엔쪼 페라리와 디노엔쪼 페라리는 원래 밀라노에 있는 자동차 제조사 알파로메오(Alfa Romeo; 고급 스포츠카를생산하는 브랜드이지만 1911년 이후로는 카 레이싱에도 진출)의테스트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동료 중에 자신보다 기량이 더 나은 드라이버가 있어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못할 것 같아 운전대에서 손을 뺀다. 대신 알파 로메오의 레이싱을 관리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Scuderia Ferrari; 지금도 건재한 페라리의 카레이싱
창과 방패; 베링과루 한편 베를린에서 베링은 디프테리아를 치료할 수 있는 화학약품을 찾는 연구를 한다. 베링은군의관으로 지내면서 소독약(iodine tri-chrolide)이 ‘균의독성을 중화’해서 병을 치료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었기에, 디프테리아에도소독약을 한번 써 보기로 한다. 베링은 디프테리아균을 주사한 실험 쥐에 치료 목적으로 소독약을 주사한다. 소독약은 그 자체로도 부작용이 많았다. 하지만 독소를 중화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실험 쥐들에게 주사한다. 결과는 쥐들의 떼죽음이었다. 하지만몇 마리는 디프테리아도 견디고 소독약도 견뎌 살아남았다. 한마디로 구사일생(九死一生)의 결과였다. 구사일생한 이 녀석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혹시 소독약이 효과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사람에게도 한번 써볼 수있지 않을까? 베링은 과감하게 디프테리아 환자에게 소독약을 주사한다.주사 부위의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소독약은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다. 소독약은 사람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실험 쥐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베링의 고민은 깊었다. 물론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구사일생의 실험 쥐들은 디프테리아균의독소를 중화시키는 물질 즉, 항
연말이 다가오면 신경과 학회에서 메일을 받는다. <의당 학술상>이나<에밀 폰 베링 학술상> 받을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내용이다. 상금이 수 천 만원이나 되는 큰 상이다. 물론 필자가 받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지만 개원의인 필자가 상을 받을 일도, 후보자를 추천할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특별한 이름이 붙은 상이라 필자는 그 사연이궁금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어있나 한번 알아보았다. <의당(毅堂) 학술상>은 진단검사의학의 개척자이자 헌혈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故의당 김기홍 박사(1921~1986)을 기념하는 상이다. 의당박사의 유족과 대한의사협회가 1994년에 제정해 매년 수여하고 있다.수상 자격은 우리나라의 기초의학전공학자 및 임상병리학 전공학자에 국한된다. 그러므로 신경과개원의인 필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렇다면 꿩 대신 닭이라고, 혹시 <베링상>은 필자가 한번 노려도 될까? ‘베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베링해(海)’다. 조사해 보니 베링(VitusJonassen Bering;1681~1741)은 덴마크 출신의 러시아 항해가로, 지금의베링해와
자신이‘(구안)와사풍’에걸렸다며 신경과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을 종종 본다. 이 어려운 이름이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구(口)+안(眼)+와(喎)+사(斜)+풍(風)’이란 글자들로이루어져 있다. ‘찬기운이 원인이되어 입과 눈이 비뚤어지는 병’이란 의미라 한다. 신경과에서는간단히 ‘벨 마비(Bell’s palsy)’라고 부른다. 벨은 이 병을 기술한 의사 챨스 벨(Sir Charles BellKH FRS FRSE FRCSE MWS; 1774~184)의 이름이다. 의료계에는 벨 성(姓)을 가진 의사들이 꽤 많다. 가장 유명한 벨은 아마도 셜록 홈즈의모델이 되었던, 에딘버러 의대 외과의 조셉 벨(Joseph Bell;1837~1911) 교수가 아닐까? 일찍이 그의 제자였던아서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 1859~1930)이 죠셉 벨 교수의 꼼꼼한 관찰력에 감명을 받아 셜록 홈즈라는 독특한 캐릭터를창조했으니까. 그렇다면 죠셉과 챨스는 집안 사람일까? 결론부터말하자면, 아니다. 하지만 같은 고향 사람이긴 하다. 찰스 벨의 삶찰스 벨은 1774년에 스코틀랜드의에든버러 변두리에서 스코틀랜드 성공회 신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챨스가 학교에도 들어
제주에서부산 가는 비행기를 타면 거문도 상공을 지나가게 된다. 날이 좋으면 두 개의 섬이 마주 보며 만든 천혜의항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거문도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거문도를 볼 때마다 개화기에 영국이거문도를 점령한 역사가 떠오른다. 국사 시간에배우기로는 영국 해군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이 외딴 섬을 점령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부족하다. 당시의 세계를 살펴보면 러시아제국은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후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히 남진정책을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중동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1839년과1878년), 유럽에서는 크림 전쟁(1853년)을 불사했다. 그연장선상에서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1885년). 19세기의 해양강대국인 영국과 대륙의 맹주 러시아는 이렇게 사사건건 대립하고 충돌했지만, 러시아제국은 거문도 사건후 30여 년이 지나면서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제국의몰락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의사인 필자가 보기엔 질병도 한몫을 한 것 같다. 그런데 그 병이 바로 숙적 영국 왕실로부터 넘어온 것이다. 오늘은바로 그 이야기를 해본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차르(
프랑스 음악가 마랭 마레(MarinMarais;1656~1728)는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 1991)>을통해서도 우리에게 아주 조금 알려진 17~18세기 음악가다. 그는비올(Viola da gamba) 연주자이자 작곡가였고, 베르사이유에서루이 14세의 궁정음악가로 활약했다. 그는 아주 특이한 작품하나를 남겼는데 의사라면 누구라도 들어봐야 할 작품이다. <Tableau de l’Opération de la Taille>라는 작품 제목을 우리말로 풀면 <절제수술대>가 된다. 이것은 자신이 1725년에 겪었던 ‘방광 결석 제거수술’을 표현한 음악이다. 인터넷에서 다양한 영상과 연주를 찾아볼 수 있지만필자가 추천하는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kVH0qoJZDho)은 6분짜리로 3분10초까지는 끔찍한 수술, 이후로는 회복기의 소회를 표현하고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영상을 감상해야 할것이다. 비뇨계 결석(urolithiasis)는 과거에는 아주 흔했던 병이다. 남자와 어린이에게 많았다. 추위,비뇨기 감염, 부족한 식수 등이 원인이었다.
콜레라. 27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아직 한번도 콜레라 환자를 본 적은 없다. 필자에게 콜레라는 국민학교 교실에서 맞던 예방주사의 이름이었고, 동남아에선 믿음직한 생수를 사먹어야 할 이유였고, 신고해야 할 법정 전염병이었다. 어떤 병인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도 없었다. 떠오르는 이미지란 열대의 더위와 사파리 모자를 쓴 탐험가 정도였으니. 하지만 콜레라는 서구 사회에 페스트만큼이나 큰 트라우마를 안긴 병이었다. 우리가 서양의 문학이나 영화에서 콜레라 이야기를 심심찮게 만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콜레라 환자가 아직 없지는 않다. 오늘은 이 유서 깊은 질병에 대해 알아보자. 콜레라cholera의 어원은 그리스어 chole 로 쓸개, 쓸개즙(bile)을 뜻한다. 쓸개즙이 검으면 멜렁콜리 melancholy 즉 우울증이 온다고 여겼고,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도 쓸개즙이 섞인 토사물과 설사를 보이면 cholera 라고 불렀다. 구토를 심하게 하면 나중에는 녹색의 쓸개즙도 보일 수 있는데, 별로 치명적인 병은 아니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무서운 돌림병이 아시아로부터 전해졌는데, 여느 콜레라와는 달라서 cholera
얼마 전, 어느 도시에서 전철을 탔다가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다소 한가한 객실 한쪽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역에서 탑승한 청년이 핸드폰의 이어폰이 아닌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고 서있었다. 조용한 전철에 음악소리가 들리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청년은 아랑곳 않고 음악을 들었다. 사람들은 그러려니하고 시선을 하나 둘 거두어 들였다. 그사이 열차는 다음 역으로 진입하며 다음 정차역을 알리는 방송이나왔는데,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송에 나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지만 다음 역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환승안내 멘트는 물론이고 목소리의 톤이나 억양, 템포까지 완벽하게 재연했다. 심지어는 영어 멘트까지도! 청년을 향한 주변의 짜증스러운시선은 점점 놀라움으로 바뀌었고 다들 청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는지 수근대기 시작했다. 필자도 청년을 넋놓고 보다가 하마터면 내릴 역을 지나칠 뻔 했다. 열차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청년이 자폐증을앓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아마도 말을 따라하는 특출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그런데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도 아니고,
영광과 좌절 “이것은 사람의 통증을 없애는 양키의 마술이다.” -19세기 영국 외과의사 리스턴(Robert Liston; 1794~1847) 모튼의 마취와 웨렌의 집도로 성공한 수술은 굳이 검증할 필요도 없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었으니까. 환자는편히 잠들었고 의사는 통증 걱정없이 수술했으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마취제의 증거가 또 있을까? 현대 의학의 개가인 마취법은 대학의 교수나 연구실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통증으로고통받는 환자들의 끔찍한 비명을 들어야 했던 진료 일선의 (치과)의사들이해낸 일이다. 당연히 엄청난 명예와 그에 따른 보상이 ‘마취의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자신을 마취의 진짜 아버지로 주장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로 처음에는 모튼이 아버지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튼 이전에 웰스가 있었다. 웰스는 모튼이 자신을 배신하고 아이디어까지 도용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참지 않고 자신이 진짜 아버지라고 나섰다. 모튼은 그 정도는 예상한 듯 재빨리 ‘레테온’으로 특허를 받았다. 특허가난 마당에 웰스도 어찌할 수 없지 않을까? 웰스는 아무런 인정도 못받고 2년
“아름다운 꿈은 실현되었다. 수술은 이제 고통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디펜바흐(JohannFriedrich Dieffenbach; 1794~1847), 19세기 외과의사. 마취(痲醉)란 약물로 일정 시간 의식이나 감각을 사라지게 하여 강한 자극에도 반응할 수없게 만드는 의료 기술이다. 1846년에 미국의 의사이자 작가인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Wendell Holmes; 1809–1894)는 감각을 뜻하는 그리스어 ‘esthesia’ 에 부정형 접두사인 ‘an’ 을 결합해 우리 말로마취에 해당하는 단어를 만들었다. 우리말 마취는 감각을 마비(痲痺)시키기 위해 환자를 약에 취(醉) 하게 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물론 그전에 마취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마취는 19세기 중반에 미국인의 손으로 ‘발명’되었다. 그만큼 마취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은 매우 크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알아보자. 마취의 시작 마취란 이름은19세기에 지어졌지만 그전까지 마취를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역사 시대 이전부터마취법을 알았고, 마취법을 이용해 수술도 했다. 그렇다면언제부터 마취를 했을까?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는 몸에 박힌 독화살을 화타(華陀)가 빼내
2010년 6월에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625전쟁동안 이 땅에서 활약했던 UN 의료지원단 5개국의 활동을알린 바가 있다(<UN 의료 지원단을 아시나요>편참고). 오는 9월에 부산시는 부산에서 6년 6개월 동안 활동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Swedish Red Cross Field Hospital; 이하 SRCFH)의휘귀자료를 한 곳에 모아 특별전시회를 연다(2017년 9월 13일~9월 30일.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이기회에 SRCFH 는 어떤 병원이었는지 알아보자. 625전쟁이 발발하자 UN의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UN의 깃발아래 우리나라에 전투병을 파병한 일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의5개국이 인도적 차원으로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스웨덴은 가장 최대규모, 최장기간으로 활동했다. 파견전쟁 발발 3주 만인 7월 14일, 스웨덴이 제일 먼저 UN에의료지원 의사를 밝혔다. 8월에국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자 스웨덴 정부는 지원단 파견을 자국 적십자에 일임했다. 스웨덴 적십자가 자원자를모집하자 600명 여명이 지원했고, 그 중 176명이 선발되었
수혈의 역사 (Ⅱ) 혈액은행의 등장 1930년에 모스크바의 외과의사 유딘(Sergei SergeevichYudin; 1891~1954)은 심한 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에게 죽은 지 몇 시간 안 되는 사람의 몸에서 뽑은 피를 과감하게 수혈했다. 환자는목숨을 건졌다. 이런 섬뜩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는 전 해에 우크라이나의 수혈학자인 샤모프(Vladimir N. Shamov;1882~1962)가 내놓은 특별한 연구에서얻었다. 샤모프는 사람이 숨을 거둔 후라도 일부 조직은 몇 시간 정도는 살아있는데, 피는 10시간 정도 살아있으므로 적절히 재활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딘은 샤모프를 믿고 죽어가는 이에게 죽은 이의 피를 수혈했고, 샤모프의 연구가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수혈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일단 유딘은 병원 내에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신이 있는 경우에만 수혈을 했다.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딘의 병원에 죽은 지얼마 안 되는 시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유딘은 좀 더 과감하게 한발을 내디뎠다. 숨을 거둔 이의 몸속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었던피가 쓸모가 있다면, 아예 미리 뽑아내 몇 시간 저장해둔
수혈의 역사 (Ⅰ) 필자가 본인의 혈액형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다. 흰 가운을 입은 보건요원들이 교실로 찾아와 교탁 위에 실험대를 거창하게 차려놓고 한 명씩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손가락을 란셋으로 찌른 후 피를 받아 슬라이드 글래스 위에 올려놓고 휘휘 저은 다음 혈액형 판정을 해주었다. 필자는 A를 받았다. 학점은 아니었지만 B를 받은 친구들에 비해 A를 받은 친구들은 무척 으슥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14년 후 처음 헌혈 버스에 올라간 필자는 혈액형이 A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무척 놀랐다. 더구나 새로 받은 혈액형은 성격이 까칠하기로 악명이 높은 AB형이 아닌가! 무척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적십자 요원에게 재차 확인을 받아도 여전히 요지부동한 AB형이었다. 과거에는 검사를 대충해서 잘못된 판정이 나간 경우가 많다며 위로를 해주었지만 한동안 필자의 심경은 쓰라렸다. 혈액형과 성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위로해 보았지만, 아내와 심지어 나와 피를 나눈 아이들까지도 아빠의 까칠함을 순전히 혈액형 탓이라고 여기며 자신들은 AB형이 아닌 것에 은근히 안도하고 있다. 세상은 AB형에게 왜 이다지도 가혹한 걸까? 그래서 AB형 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