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병원협회, 시민단체, 진료현장에서 일하는 의사 등 관계자들이 응급실 당직 전문의 배치를 의무화한 응급실 당직법에 대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응급실 당직전문의를 의무화하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 시행 40일을 맞아 응급의료기관의 현황을 파악하고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12일 문정림 국회의원의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 신관 2층 제1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이날 토론회의 좌장으로는 문정림 국회의원, 토론자로는 정은경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장, 허대석 서울의대 교수, 정용호 대한병원협회 정책위원장,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 조경애 건강세상네트워크 고문, 정승준 경실련 보건의료위원, 임태호 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 유경하 대한소아과학회 기획이사, 이성규 대한중소병원협회 재무위원장, 양현덕 대한병원의사협의회 부회장, 양광모 청년의사 편집국장 등이 참석했다.
행사의 첫 번째 순서로 제도의 경과 및 현황에 대해 정은경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장이 발표했다.
정 과장은 발표를 통해 “전문의 인력이 부족하고 온콜제도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등 제도에 대한 문제점이 국회입법조사처, 병협, 중소병협 등 각계에서 제기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응급의료 수가와 응급의료체계를 개편하는 등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복지부의 추진계획을 밝혔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응당법에 대한 다른 토론 참석자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응급의학과와 진료과의 역할 및 책임 문제를 명확히 해야…
보건의료연구원장을 역임한 허대석 서울대 의과대학 내과교수는 “개정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및 시행규칙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역할이나 책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정이 없고, 모든 책임을 진료과별 전문의로 집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응급실에 방문하는 환자에 대한 진료의 일차 책임은 응급의학과에 있음에도, 진료과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일부병원에서는 응급의학과가 독자적으로 병상을 운영하면서 응급실 근무 인력을 병실에 배치해 응급진료 인력부족을 심화시키고 진료과와의 업무영역 설정에도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첫 번째 시정해야 할 일은 응급환자 진료에 있어서의 응급의학과의 진료과의 역할 및 책임문제를 명확히 해두는 일이다”라고 전했다.
만성적자인 응급의료기관에 대한 지원 확대해야…
정영호 대한병원협회 정책위원장은 개정된 비상진료체계는 응급의료기관에 설치된 모든 진료과목에 1인 이상의 당직전문의를 두며, 응급실 당직의사의 직접진료 요청 대상은 당직 전문의 등으로 국한하도록 기준을 강화하고, 동 기준을 각 종별의 모든 응급의료기관이 동일하게 적용해야하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진료과목당 전문의가 1~2명에 불과하고 간호사 인력마저 부족한 상황에 처한 많은 지역응급의료기관들은 해당 전문의가 비상진료대기를 전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돼 외래와 입원환자에 대한 진료차질을 우려하고 있다”며 “개별 응급의료기관지정을 반납하거나 고려중인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정 위원장은 “강화된 비상진료체계는 국가 전체의 응급의료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인 점에는 공감하나 각 응급의료기관의 자발적인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정된 응급의료기관의 종별·규모별 차이와 국가전체의 부족한 의료자원의 효율적인 활용 측면을 감안해 궁극적으로 법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는 개정작업을 위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만성적자구조인 응급의료기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확대하고 수가를 개선하는 등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 달라”고 복지부에 요구했다.
전공의의 진료권 침해
전공의 대표로 참석한 경문배 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은 응당법에 대해 “신속하고 효율적인 응급의료전달체계 도입을 위한 현 개정안이 의료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시행규칙 상 불분명성이 있으며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다”고 밝혔다.
경 회장에 따르면 응당법은 “응급실 진료 자체를 당직전문의로 제한해 국가고시에 통과해 면허를 갖고 있는 전공의들의 진료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당직전문의 업무증가 ▲응급실 방문환자의 80%가 경증환자인 현실에서 응급환자와 비응급환자를 구분하는 문제 ▲당직전문의의 당직 수당에 대한 보상 ▲당직전문의 배치로 인한 수련기회 박탈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법률 시행으로 각 병원에서 자행되고 있는 편법과 그 안에서 전공의들이 겪고 있는 고충과 혹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조사할 것이며, 추후 피해사례들에 대해서 개선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병원의사 입장에서 바라본 응당법
병원의사협회 부회장인 양현덕 원광대 산본병원 교수는 “응급진료가 매우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진료, 수련의 교육 등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며 “응당법은 이러한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전문 인력이 응급환자 진료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의료현장의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통상적인 외래환자나 입원환자의 권익 침해 ▲응당법 기준을 따르지 않은 의사에게 면허 정지 내지 취소까지 내리는 가혹한 행정처분의 부당성 ▲당직전문의들의 과로와 권익침해 등의 문제들을 지적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미국처럼 호스피탈리스트(hospitalist) 제도시행▲응급실 전담 전문의 제도 시행 ▲의원을 포함한 다른 의료기관의 의사들이 부업으로 당직을 설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시한 모든 대안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밝혀 봉직의사로서 갖고 있는 복잡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응당법 차등적용에 대해서는 당직전문의 기준 미충족 등을 이유로 의료기관의 요청에 의해 상당수의 지역응급의료기관이 취소됐고, 개정 전 당직전문의의 자격을 전문의 또는 3년 차 이상의 레지던트로 규정하고, 응급의료기관의 규모에 따라 당직전문의를 두어야 하는 진료과목을 차별화 하는 점 등을 지적하며 현명한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온콜(On-call)제도가 아니라 전문의 상주 당직제도가 필요
시민단체의 의견도 있었다. 조경애 건강세상네트워크 고문은 의료계와 전공의의 반발이 심하자 온콜(On-call)을 허용하고 당직 규정에서 전공의를 뺀다고 발표한 것은 행정절차법 위반이며 비상진료체계는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성토했다.
따라서 비상진료체계 개편을 위해서는 “응급기관별 기능을 명확히 구분하고 응급진료권별로 과잉, 과소를 해소하고 적정한 자원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환자 중증도에 따른 분류체계를 구축해 현재와 같이 환자 요구나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의료기관으로 이송하는 대신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료능력이 있는 적절한 의료기관으로 이송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응급의료기관에 설치된 진료과목마다 1인 이상의 당직전문의를 두고, 응급실 근무의사가 요청하는 경우 전문의가 직접 진료토록 하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 및 하위법령은 3개월의 계도기간을 현재 운영하고 있는 중이며 오는 11월부터 실시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