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산부인과의사회(회장 김재연)는 보건복지부가 지난 11월 26일 발표한 ‘필수의료 전문의 의료사고 배상액 국가 보장’ 방안에 대해, 붕괴 직전의 필수의료 현실을 엄중히 인식하고 국가 책임을 강화하려는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에 감사드리며 환영의 뜻을 밝힌다.
이번 정책은 국가가 민간 의료기관의 배상책임보험료 상당액(약 88%)을 직접 지원하고, 배상 한도를 최대 15억원(기존 통상 1~3억원)까지 획기적으로 상향 조정함으로써 의료진의 경제적 파산 위험을 방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는 과거 의료사고의 책임을 온전히 개별 의료기관과 의사 개인에게 전가해왔던 ‘자력 구제’ 방식에서, 국가가 위험을 분담하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비록 전액 국가배상제가 아닌 ‘보험료 지원’ 형태라는 점과 2억원이라는 높은 자기부담금 등 현실적인 아쉬움이 존재하나,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해 회원들의 안정적인 진료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밝힌다.
다만, 이번 대책이 현장에서 실효성을 거두고 산부인과 인프라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중대 결함들이 반드시 보완돼야 한다.
첫째, 높은 자기부담금(2억원)은 동네 산부인과에겐 여전히 폐업 선고와 같다.
정부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전문의의 사고당 자기부담금을 2억원으로 설정했다. 이는 대형 병원(상급종합병원)에게는 감당 가능한 리스크일 수 있으나, 저출산과 저수가로 경영난에 허덕이는 지방의 소규모 분만 의원에게 현금 2억원의 일시 배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보험이 있어도 망할 수 있다”는 공포가 존재하는 한 분만 인프라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의료기관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자기부담금 제도의 개선을 요구한다.
둘째, ‘1년짜리 예산’이 아닌 ‘법적 의무 지출’로 지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이 사업의 예산은 2025년도 신규 사업 예산(약 50억원)으로 책정된 '단년도 사업'이다. 의료사고 소송은 통상 4~5년 이상 소요되는데, 예산 사정에 따라 지원이 중단된다면 고액의 보험료와 배상 책임은 다시 의사 개인의 몫이 된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이번 발표가 단순한 '시범 사업'에 그치지 않도록, 필수의료 지원을 법률에 명시해 국가의 영구적인 책무로 정착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셋째, 형사 처벌 면책 없는 배상 지원은 반쪽짜리 대책에 불과하다.
한국 의료계가 겪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민사상 배상이 아니라, 선의의 의료행위 결과에 대해 형사 처벌을 가하는 과도한 사법 관행이다. 배상금이 해결된다 해도, 의사가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입건돼 수년간 수사와 재판을 받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의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돈을 물어주는 것’보다 ‘전과자가 되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은 종합보험 공제에 가입한 경우, 중과실이나 고의가 없는 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현재 환자 단체의 반발과 정치권의 무관심으로 입법이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형사 면책 없이 민사 배상 한도만 늘리는 것은 자칫 소송 가액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이번 보험료 지원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돈으로 막을 수 없는 사법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의료사고처리특례법의 조속한 제정을 통해 의사들이 감옥 갈 걱정 없이 오직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기를 강력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