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를 수련병원에 배치하고 방치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전문의 육성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 관리, 감독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2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전공의 건강권 확보 및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가 개최됐다.
전국전공의노동조합 유청준 위원장은 전공의 근로실태 조사 현황을 공개하며 전공의들의 과도한 근로와 수련환경 문제를 지적하고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유 위원장은 먼저 지난 9월 전공의 113명 대상으로 실시했던 근로실태 조사 결과를 공유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유 위원장에 따르면 응답자의 80.3%는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의국 소속임에도 주 64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으며, 52.9%는 주 72시간 이상, 12.9%는 주 88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 위원장은 “만성과로 산재인정 기준이 주 60~64시간인 점을 고려하면, 80% 이상의 전공의가 사실상 만성과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근무 시간뿐 아니라 휴식권과 건강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현실도 드러났다. 조사결과 전공의의 75.5%가 근로기준법상 휴게 시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77.2%는 격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경험이 있고, 75.9%는 건강이 나빠져도 자율적인 병가나 연가 사용이 보장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유청준 위원장은 “50.7%는 격무로 인해 환자 안전에 영향을 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며 “전공의들이 만성 과로에 시달리면서 휴식권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 환자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45.7%의 응답자가 부당한 업무 지시, 대리당직, 대학원 의무등록, 논문대필 등의 병원 내 부조리를 목격했다고 답했다.
지난 해 5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전공의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에 대한 현실적인 한계도 나타났다. 유 위원장은 “근로시간 단축 시범사업은 주 평균 72시간, 연속 근무 24시간 제한을 골자로 하고 있으나, 조사결과 참여 65%의 병원, 일부 과에서는 여전히 근로시간을 준수하지 않고 있다. 근무 강도가 높은 과일수록 이행율도 낮았다”며, 대체 인력 없이 전공의에게만 업무를 전가하는 구조가 여전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유 위원장은 “전공의 1인당 교육 시간은 주 평균 2.83시간에 불과하며, 실제 교육은 근무 시간과 분리되지 않고 점심시간이나 개인 시간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모범 사례에서는 당직 횟수를 주 1회 수준으로 조정하고, 당직 전담인력을 배치하거나, 전공의에게만 맡겨졌던 행정 업무를 대체 인력이 담당하게 하는 등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있지만, 부적절하게 운영되는 경우 전공의들의 수련 환경이 악화되고 있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유 위원장에 따르면 교수이름이 적혀있으나 전공의가 당직을 서는 등 당직표를 가짜로 제작하거나, 당직근무 위주의 근무일정 등의 사례가 보고됐다. 근로시간만 표면적으로 제한하고 방치하면 동료 전공의 업무까지 떠맡아서 업무 강도는 오히려 심화되고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교육 기회도 박탈되는 결과를 만든다는 분석이다.
유 위원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가지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전공의법을 추가로 개정해 총 근로시간을 감축하고, 근로시간 위반 시 책임자에 대해 최소 벌금형 이상의 처벌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내용이 제안됐다. 또 전공의에게 의존하는 수련병원 체계에서 벗어나 전문의를 중심으로 병원을 재편하고, 과별 적정 업무량과 전공의 1인당 환자 수 제한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유 위원장은 주 1회 이하로 당직근무를 제한하고 정규근무 중심의 근무 설계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연속근무 24시간 제한 도입 등이 필요할 전망이다.
또 유 위원장은 수련환경 평가와 관리·감독 체계의 독립성 확보도 강조했다. 유 위원장은 “현재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병원협회 위탁 구조로 운영되는데, 이는 감사 대상과 평가 주체가 겹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독립성과 상시 관리·감독 권한을 확보하고, 신고가 실제 조치로 이어지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국가 책임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유 위원장은 “전공의 급여, 교육 지도 등 전문의 양성의 관점에서 국가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 이미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전공의 급여나 교육 인프라를 국가가 지원하고 있다. 수련의 질 표준화도 필요한 만큼, 국가 차원에서 연차별 역량기반 커리큘럼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유 위원장은 “수십년간 방치해온 문제이므로 한 가지 해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머리를 맞대고 종합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형렬 교수는 근로시간과 건강, 진료 안정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노동시간의 길이 ▲밀도 ▲배치 세 측면이 중요하다”며, 수련시간의 단축과 규칙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의학회 박용범 수련교육이사는 “전문의 배출을 위한 적정역량 확보는 비타협적인 전제”라며, 수련시간 단축 시 전체 수련기간을 조정해 역량을 확보해야 함을 주장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고범석 부회장은 “AI가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AI를 통해 기존 전공의 업무 중 비교육적인 부분을 대체하면 근로시간 단축과 교육시간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병원의학회 신동호 회장은 “단순히 전문의 하나를 병원에 집어넣는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다”라며, 인원진료 시스템의 전환, 팀 기반 진료모델 도입 등을 했다.
부산백병원 예방의학과 김새롬 교수는 과거 대한전공의협의회 집행부 활동 당시 전공의법 제정을 주도했던 경험 바탕으로 “정책 수립이 합리적 기준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기존 시스템을 변화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전공의노조에 세력화와 연대 전략을 주문했다.
아주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김대중 교수는 21일부터 시행되는 연속근무 24시간 제한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며, 전공의의 수련시간 단축이 교수 등 다른 직역과 전공의 스스로의 수련 연속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짚으며 고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강민구 전 회장은 “전공의 노동시간 단축은 인력구조 개편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며 “결국 병원이 사람을 더 채용해야 한다”고 했다. 입원의학 분야 전문의, 촉탁의, 입원전담전문의 등의 확대 없이 노동시간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
또 “PA만으로 전공의 업무를 대체하지 않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인력수급과 인턴제도의 개편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방영식 보건복지부 의료인력정책과장은 토론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에 동의했다. 방 과장은 “수련국가책임제의 발전과 역량중심평가로 전환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준비 중인 부분이 있다”고 했다.
대한전공의협회 한성존 회장은 “전공의 수련환경은 ‘무제한 헌신’을 강요하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전공의가 근로자로서 적당한 보호를 받을 때, 비로소 교육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수준높은 전문의로 성장해 국민 건강에 기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토론회를 주관한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전공의는 수련과정에 있다는 이유로 장시간 근무환경에서 격무에 시달리며 건강권은 물론 양질의 수련을 받을 권리마저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면서 “본연의 수련목적에 부합하는 프로그램과 합리적인 수련시간으로 수련제도를 개선해나가는 과정에서 전공의노조 등 당사자들의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